항목 ID | GC04900648 |
---|---|
한자 | 朴世堂 |
이칭/별칭 | 계긍(季肯),잠수(潛叟),서계(西溪),서계초수(西溪樵叟),문절(文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혜원 |
출생 시기/일시 | 1629년 - 박세당 생 |
---|---|
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박세당 문과 장원 |
활동 시기/일시 | 1668년 - 박세당 수락산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703년 - 박세당 졸 |
추모 시기/일시 | 1722년 - 박세당 문절(文節) 시호 받음 |
거주|이주지 | 박세당 은거지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97 |
부임|활동지 | 박세당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묘소|단소 | 박세당 묘소 -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반남(潘南) |
대표 관직 | 이조판서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세웠던 구일(具鎰) 묘표를 찬한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
[개설]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당쟁이 치열하던 당시 정치에 대해 문제의식을 표출하였으며 사회 개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당대 주류 학문이던 주자학(朱子學)이나 중국 중심의 학풍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이러한 경향 때문에 노론이 집권한 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공격받기도 하였다. 도봉산 기슭에서 반남 박씨(潘南朴氏) 집안이 대대로 살았다고 한다.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西溪)·서계초수(西溪樵叟). 증조할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지낸 박응천(朴應川)이고, 할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다. 아버지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참여한 공으로 정사훈(竫社勳) 3등에 책훈되어 분충 찬모 정사공신(奮忠贊謨靖社功臣)의 호칭을 받고 이조 참판을 역임한 박정(朴炡)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안국(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楊州尹氏)이다. 부인은 남일성(南一星)의 딸이자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슬하에 박태유(泰維)·박태보(泰輔)의 2남을 두었으나 박세당보다 먼저 요절하였다. 계배(繼配)는 정시무(鄭時武)의 딸인 광주 정씨(光州鄭氏)이다.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던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활동 사항]
박세당은 4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다가 13세 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가서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 증광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된 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 교리 겸 경연 시독관, 함경북도 병마평사 등 내직과 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 세태에 회의를 느껴 1668년(현종 9) 1월 관직을 버리고 양주 수락산 석천동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그 뒤 몇 차례 다시 관직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석천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죽을 때까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박세당도 처음에는 서울과 경기의 일반적인 서인 계열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봉 서원에 들러 독서를 하기도 했으나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면서 도봉 서원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학문과 저술]
학문이 깊었던 관계로 여러 편의 저서가 전한다. 『서계 선생집(西溪先生集)』과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상서(尙書)』·『시경(詩經)』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과 도가(道家) 연구서인 『신주 도덕경(新註道德經)』 및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이 전한다. 청나라 연행을 다녀오고 지은 『서계연록(西溪燕錄)』, 『사연록(使燕錄)』과 아울러 편저인 농서(農書) 『색경(穡經)』 등이 전한다.
묘갈문 및 신도비문도 여러 편 지었는데 이석 묘갈(李䄷墓碣), 김일진 묘갈(金一振墓碣), 임윤석 묘갈(任允錫墓碣), 이여발 신도비(李汝發神道碑), 최명길 신도비(崔鳴吉神道碑), 이경석 신도비(李景奭神道碑), 구일 묘표, 나성두 묘갈(羅星斗墓碣) 등이 전한다. 이 중 1702년(숙종 28)에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문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했다 하여 성균관의 탄핵을 받고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공격받았다. 1702년 세워진 구일 묘표는 박세당이 찬한 것을 구일의 아들인 구지정(具志禎)의 글씨로 새겨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세운 것이다.
[묘소]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반남 박씨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평소 송시열(宋時烈)과 주자(朱子)를 비판하는 등의 행보로 노론의 공격을 받아서,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란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