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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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狎鷗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각순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던 조선 전기 권신 한명회의 별서.
[개설]
압구정(狎鷗亭)은 압구정동 산310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 72동·74동 일대에 있었으며,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별장이었다. ‘압구정’이란 정자의 이름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사신으로 온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지었는데, 그 뜻은 권신으로서의 한명회의 생활과는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압구정기문(狎鷗亭記文)」에 전하고 있는데, 바람과 실제가 다른 한명회의 행적은 이곳을 지나가는 문인·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한명회는 관직을 사퇴하고 압구정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지내려 하니, 성종 7년(1476)에는 왕이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친제하여 하사하며 이별하자, 조정 문신들도 차운(次韻)하였는데 그 시가 수백편이나 되었다고 한다. 압구정은 중국에도 알려져 명나라 고관대작들이 「별서압구정시축(別墅狎鷗亭詩軸)」에 시를 수없이 담아 보내기도 하였다.
한명회는 일찍이 초반에는 행색이 초라하였는데, 권람(權擥)과 함께 수양 대군을 섬긴 뒤로 1455년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이 커서 1등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고, 이듬해 성삼문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좌절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1457년에 이조판서로 상당군에 봉해졌고, 1462년에 상당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4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고명을 받아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결재하며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려 익대공신 1등이 되었다. 다시 영의정이 되고 두 딸은 각각 예종의 장순왕후와 성종의 공혜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1504념 갑자사화 때 윤씨 폐비사건에 관련되었다고 하여 부관참시되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린 「압구정도(狎鷗亭圖)」에 보이는 정자의 모습은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는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말에는 저자도와 함께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朴泳孝)[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국적(國賊)으로 일체의 재산이 몰수될 때 이 정자도 몰수 되었다가 고종 말년에 다시 찾았다. 이후 1970년대 영동개발에 따라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동네이름으로 남게 되었으며, 근래에 표석을 설치하여 압구정 터임을 밝혀 놓았다.
[위치]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 일대인 동호대교 옆 현대아파트 11동 뒤편 72·74동 일대에 있었다. 동호의 남쪽 강가 저자도와 한강 물 사이 서남쪽 바라보이던 언덕바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정자에서 강 건너 오른쪽으로 뚝섬을 위시하여 서울의 동교[살곶이벌]가 가까이 보이고, 멀리는 삼각산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현황]
현대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를 알리는 표석만이 설치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당대 권신의 별서로 경영되었지만 한강 변의 경승을 연출하고 수많은 시문을 남기는 계기되어 조선 시대 관인 및 사대부의 풍류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