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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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江陵邑城 |
영어음역 | Gangneungeupseong |
영어의미역 | Gangneungeup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 명주동, 용강동 일원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흥술 |
[정의]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명주동·용강동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 강릉부의 행정성(行政城).
[개설]
읍성(邑城)은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치소지(治所地)에 축조한 성곽으로 조선 전기에는 대략 120여 곳이 유지되었다. 상비군에 의한 충분한 조치가 어려웠던 당시 불시에 발생하는 외침으로부터 주민의 생명은 물론, 지방 관아의 각종 행정 자료와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읍성이 필요하였다.
강원도의 경우 왜구나 야인의 침입이 잦았던 동해안에는 그 필요성이 더 절실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읍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외침에 대하여는 취약하였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방어 시설로서 읍성의 비중은 크게 낮아졌다. 강원도 지역의 조선시대 읍성은 강릉·통천·간성·고성·양양·삼척 지역에 있었다.
[건립경위]
강릉읍성의 초기 축성 과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고려 말 남부 지역의 연해에 축성된 여러 읍성과 같거나 조금 후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세종대의 「읍토성(邑土城)」이라는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고려 말~조선 전기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종 대에는 강릉·평창·정선·영월의 군사 1,556명을 동원하여 총연장 3,720척, 높이 5~6척 또는 7~8척의 성을 쌓게 하였으며, 중종대에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전술한 지리지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1452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읍토성으로 불리다가, 1478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632.4m, 높이 1.2m의 토축과 둘레 41.7m, 높이 0.6m의 석축으로 기록되어 있다. 1528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1512년(중종 7)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고, 문을 4곳에 두었으며 우물이 14곳, 연못이 2곳이며 성의 둘레가 1,134.6m로 되어 있다. 그 후 여러 기록들이 모두 둘레 2,782척 정도로 기록하고 있으며, 초기 토성 자리에 석축으로 개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읍성의 실제 둘레는 1,826m로 기록과 다른 것은 당시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만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치]
강릉읍성은 고려시대 강릉부(江陵府)가 있었던 읍치(邑治)에 축조된 성곽이다. 그 주변은 남서쪽으로 성산면 어흘리의 대관령, 보광리 그리고 왕산면 목계리 남쪽 두리봉과 대화실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구산에서 시내로 흘러온 물은 남쪽에 제비리 · 회산동·내곡동·노암동·입암동·두산동, 북쪽에는 금산리·홍제동·남문동·성남동·옥천동·포남동·송정동을 지나 동해로 유입된다.
북으로는 화부산에서 서쪽으로 고개가 병풍처럼 이어지고 있으며, 동쪽은 평야지대가 바다와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남대천 북쪽 읍성이 위치했던 지역은 해발표고 70m 미만의 낮은 평지이다. 현재 강릉읍성 자리는 시가지화 되어 거의 살펴볼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지적도면을 살펴보면 그 영역을 확인할 수 있다.
도면상으로 보면, 남북으로 마름모형으로 나타나는데 임영관지(臨瀛館址)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임영로 155[용강동 36-8번지], 남쪽은 명주동 63-5번지, 동쪽은 성내동 12-3번지, 서쪽은 용강동 46-6번지이다. 강릉읍성은 이 네 곳을 연결하여 정남북으로 마름모꼴 형상이었다고 추정된다.
[형태]
성내(城內)의 지형은 대체로 북쪽이 남쪽보다 높으며, 동쪽보다 서쪽이 높은 형상을 하고 있다. 강릉읍성에는 동서남북에 가해루(駕海樓), 망신루(望宸樓), 어풍루(馭風樓), 빙허루(憑虛樓)의 문루를 갖추고 있었으며, 동문루에는 금종을 매달아 수차에 걸쳐 개수한 기록이 확인된다. 대문의 쓰임새는 중·개수 기록이 빈번했던 동문과 남문이 대체적으로 활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동읍지』의 기록에 의해 성내에 있었던 관청의 시설물을 살펴보면, 1788년경 읍성의 모습은 여러 공해(公廨)가 성내를 채우고 있었다. 성곽 축조 방식은 현재 시가지로 변하여 정확한 판단은 어려우나 경사지인 서북벽은 내탁식으로 축조하였으며, 현재 확인되는 동벽 부근의 모습에서 대부분 성벽의 하부는 내탁하여 상층부는 남동벽의 경우 내외협축 방식으로 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련기록]
『관동읍지(關東邑誌)』의 「강릉부선생안(江陵府先生案)」에 보이는 강릉읍성 또는 읍성 내의 구조물과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1565년부터 1854년까지 약300년 동안 읍성 내의 각 건축물의 창건, 개축, 보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읍성과 관련한 직접적인 기록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 경 부사 서득운(徐得運)이 성을 더 축조한 사실이 처음 보인다. 이때까지 강릉읍성은 군사적 목적보다 행정적 목적으로 활용되어 왔던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성을 더 축조한 것은 전쟁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강릉 사회가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강릉읍성에 관한 주요 기사는 읍성의 동문과 남문의 중·개수에 대한 것이 자주 보인다. 1630년(인조 8) 경 부사 민응형(閔應亨)이 4문 조성을 시작했고, 1710년대 유헌장(柳憲章)이 남문 근처의 성첩(城堞)을 다시 쌓았으며, 김정도 성첩을 보수하였고, 1728년(영조 4) 조명신(趙明臣)은 성첩을 다시 쌓고 여장(女墻)을 새로 쌓았으며, 특히 서북문 근처에 연정(蓮亭)을 새로 건립한 기록이 보인다.
1752년(영조 28) 부사 조진세(趙鎭世)는 군사 2천 명을 모집하여 성첩의 파손된 곳을 다시 쌓았다. 1771년 부사 이득종(李得宗)은 남문 근처 성첩의 훼손된 곳을 보수하였으며, 성첩 보수 기록은 1786년(정조 10) 부사 심명덕(沈命德)까지 보인다. 성문에는 금종(金鐘)을 달았으며 이를 개주(改鑄)한 기록이 보이는데, 1800년(순조 1)경 부사 조흥진(趙興鎭) 이후로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현황]
현재 성벽의 흔적으로 짐작되는 곳은 읍성의 동북 벽에 해당하는 천주교임당성당 동측에 15m 가량이 있을 뿐이다. 1970년대까지는 남벽, 서벽의 일부는 명주초등학교와 강릉여자중학교 근처에서 확인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콘크리트 담벽으로 바뀌어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경강로2018번길 5-1[남문동 131-4번지] 민가의 담장 하부에 사용된 석재 일부는 당시 읍성의 성벽에 사용된 석재로 보인다.
현재 옛 읍성지에는 지정문화재로 국보 제51호인 강릉 임영관 삼문과 사적 제388호인 강릉 대도호부 관아 그리고,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호인 칠사당이 있으며, 시청1청사, 방송국, 기상청, 한국은행, 농협, 강릉여자중학교 등의 공공기관 단체의 건물을 비롯하여 전역이 시가지화 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강릉읍성은 고려 말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강릉의 읍격(邑格)의 승강과 부침을 같이하며 현부성(縣·府城)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성곽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강릉읍성은 조선 시대 내내 중앙에서 내려오는 정령(政令)을 바탕으로 강릉 지역의 지방 행정이 펼쳐졌던 역사적 무대이다. 때문에 강릉읍성 터에 대한 조사와 기록을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소중한 문화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