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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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燈明寺址 |
영어음역 | Deungmyeongsaji |
영어의미역 | Deungmyeongsaji Archeological Sit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 7-3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홍영호 |
성격 | 절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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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건물 건립시기/일시 | 고려 초기 |
원건물 붕괴시기/연도 | 조선 중기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 7-3 |
[정의]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괘방산 중턱에 있는 등명사의 옛터.
[명칭유래]
등명사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풍수지리에서 입각하여 볼 때 사찰이 강릉대도호부 중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삼경(三更)에 산에 올라 붉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원건물 건립경위]
등명사의 창건 연대와 역사를 정확히 알려 주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불우조에 “부(府) 동쪽 30리에 있다.”는 기록과 이곡의 『동유기』에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미 고려시대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輿地圖書)』, 『범우고(梵宇攷)』,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므로 조선시대에도 법통이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는 “등명사는 강릉부의 등화와 같은 존재이며, 양양의 낙산사의 경치와 버금간다.”라고 언급하였다.
[위치]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화비령(火飛嶺) 동쪽 기슭 괘방산 중턱에 위치한다.
[변천]
조선 중기에 폐찰 되었다가 1956년 경덕(景德)에 의해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란 명칭으로 중창되었다. 이 사찰의 폐사와 관련된 기록은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 조선 중기에 어떤 왕이 안질이 심해서 점술가에게 물으니, 등명사에서 쌀 씻는 물이 동해로 흘러들어 용왕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왕이 폐찰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형태]
사찰의 경내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5층석탑[높이 3.5m]이 있고, 바로 뒤쪽의 평탄면에는 원형 주초석들이 있어 옛 건물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폐탑재도 있는데, 양식학적으로 5층석탑보다 시대가 앞서고,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신라 말~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절터의 초창 시기 역시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볼 수 있다.
[현황]
현재 등명낙가사라는 사찰이 세워져 있으며, 대웅전·극락전·오백나한전·요사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