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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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鼈淵寺古蹟記 |
영어의미역 | The Record of Byeoryeonsa Templ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정룡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허균(許筠)이 지은 별연사의 고적에 대한 기록.
[개설]
「별연사 고적기」는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7에 수록되어 있다. 강릉에 있는 별연사에 전승되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여기에는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의 어머니인 연화부인(蓮花夫人) 박씨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구성]
허균이 기록한 이 글은 서술 전개상 다섯 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째, 양어지(養魚池) 고사와 『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연화부인 설화를 인용하였다. 둘째, 허균이 그간의 전승설화에 대해 의심하고 새 자료를 제시할 것을 암시하였다. 셋째, 관찰사 정구(鄭逑)가 강릉부사 이거인(李居仁)이 쓴 연화부인의 사적을 수리(首吏)에게 구해 보여주었다. 넷째, 허균이 본 연화부인의 사적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다섯째, 양어지 고사의 정설을 제시하여 어머니 집안 근원을 밝혔다.
[내용]
강릉부의 남쪽에 큰 내가 있고, 그 내의 남쪽에 별연사가 있으며, 그 절 뒤쪽 언덕은 연화봉(蓮花峰)이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주원공(周元公)의 어머니 연화부인(蓮花夫人)이 여기에 살았으므로 이것을 따서 봉우리 이름을 삼았고, 절은 곧 그 옛집이라 한다. 절 앞에는 석지(石池)가 있는데, 이름을 양어지(養魚池)라고 한다.
신라 때 명주는 동원경이므로 유후관(留後官)은 반드시 왕자 및 종척(宗戚), 장상(將相)·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맡게 하고, 범사에 그 예하 군현에는 편의대로 출척(黜陟)하게 하였다. 왕의 아우 무월랑(無月郞)이라는 사람이 있어 어린 나이로 그 직을 맡았는데, 업무는 보좌관의 말을 좇아 대신 다스리게 하고 자기는 화랑도를 이끌고 산수 간에서 놀았다.
하루는 혼자 연화봉에 올랐더니 한 처녀가 있었다. 용모가 매우 뛰어났으며, 석지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무월랑은 기뻐하여 그 여자를 유혹하였더니, 처녀는 “저는 사족(士族) 출신이라 예를 갖추지 않고 혼인할 수 없습니다. 무월랑께서 만약 미혼이시라면 혼약을 행할 수 있으니 육례를 갖추어 맞이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무월랑께 몸을 허락하였으니, 다른 데로 시집가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하였다. 무월랑은 이를 허락하고, 이후에 안부를 묻고 선물 보내기를 끊이지 않았다.
임기가 차서 무월랑이 계림으로 돌아가 반 년 동안 소식이 없자 처녀의 아버지는 여자를 장차 북평(北坪) 집안 총각에게 시집을 보내고자 이미 날까지 받아놓았다. 여자는 감히 부모에게 아뢰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몰래 걱정하다가 자살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는 연못에 가서 옛날의 맹세를 생각하고 기르던 연못 속의 황금 잉어에게 “옛날에 잉어 한 쌍이 서신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너는 내게 양육 받은 적이 많았으니 무월랑이 계신 곳에 나의 뜻을 전할 수는 없겠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한 자 반쯤 되는 황금 잉어가 못에서 튀어 올라와 입을 벌려 승낙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이를 이상히 여기고 옷소매를 찢어 글을 쓰기를 “저는 감히 혼약을 위배하지 않을 것이나, 부모님의 명령을 장차 어길 수 없습니다. 무월랑께서 만약 맹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달려와 아무 날까지 도착하시면 그래도 가능하나, 그렇지 못하면 저는 마땅히 자살하여 무월랑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잉어의 입 속에 넣어 가지고 큰 내에 던졌더니 잉어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 다음날 새벽 무월랑은 관리를 알천(閼川)에 내보내 고기를 잡아오게 했는데, 관리가 회 거리 생선을 찾다보니 금빛 나는 한 자짜리 잉어가 갈대 사이에 있었다. 관리가 무월랑에게 갖다 보였더니 잉어는 펄쩍 뛰면서 재빨리 움직여 마치 호소하는 듯했다. 잠시 후 거품을 한 되쯤 토했는데, 그 속에 흰 편지가 들어 있어 이상히 여기고 읽어보니 여자가 손수 쓴 것이었다. 무월랑은 즉시 그 편지와 잉어를 가지고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크게 놀라면서 잉어를 궁중의 연못에 놓아주게 하였다. 그리고 대신 한 사람에게 명하여 채색 비단을 갖추게 하고 무월랑과 함께 동원경으로 말을 달려가게 하므로, 즉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겨우 기약한 날짜에 대었다. 도착해 보니 유후 이하 여러 관리와 고을 노인들이 모두 장막에 모였는데 잔치가 무척이나 성대하였다. 문을 지키는 관리가 무월랑이 오는 것을 괴상히 여기고, “무월랑이 옵니다.”고 소리쳐 전했다. 유후관이 나와 맞이해 본즉 대신이 따라왔다. 드디어 사연을 갖추어 주인에게 알렸다.
북평의 신랑은 이미 도착하였으나, 대신이 사람을 시켜 멈추게 하였다. 여자는 하루 앞서부터 병을 핑계 대고 머리도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강요해도 듣지 않아 꾸지람과 가르침이 한창 더했다. 그러나 무월랑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아가, 양가의 혼인을 잘 이루었으므로 온 부중 사람이 다 놀래어 신기하게 여겼다.
부인이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남은 곧 김주원이고, 차남은 경신왕이다. 바야흐로 신라의 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나라 사람이 모두 김주원을 촉망했으나, 그 날 크게 비가 내려 알천에 갑자기 물이 불었다. 김주원이 알천의 북쪽에 있으면서 건너지 못한 지가 삼 일이 되자 국상(國相)은 “이것은 천명이다.”하고 마침내 경신을 들어 세웠다.
이로써 김주원은 마땅히 즉위해야 했음에도 즉위하지 못하고, 강릉 땅에 봉해져서 주변의 여섯 읍을 받아 명원군(溟原郡)의 왕이 되었다. 연화부인은 김주원에게 가서 봉양을 받았는데 그 집을 절로 만들었으며, 왕은 1년에 한 번씩 와서 뵈었다. 4대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지고 명주가 되면서 신라도 망했다. 나는 이것을 보고서 비로소 양어지 고사를 남김없이 알게 되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해를 본 듯했다.
[의의와 평가]
허균은 자신이 제시하는 연화부인 설화의 타당성을 입증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앞서 기록한 자료들의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따라서 허균이 본 이거인 부사의 연화부인 사적이 정구 관찰사가 들은 것과 같이 옛 강릉 땅에 속했던 평창군에 구전되었고, 이 자료를 수리(首吏)에게 얻었다는 것은 당시에 널리 전승되었음을 추정하게 된다.
따라서 「별연사 고적기」는 허균이 거짓 자료라고 한 『동국여지승람』 양어지 고사 등의 기록보다 비교적 논리성을 갖추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서 명확하지 않았던 내용이 자세하게 부연되고 서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