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3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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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筠 |
영어음역 | Heo Gyun |
이칭/별칭 | 단보(端甫),교산(蛟山),성소(惺所),학산(鶴山),백월거사(白月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호 |
[정의]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학산(鶴山)·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삼척부사를 지낸 허엽(許曄)이며, 어머니는 강릉김씨로서 예조판서 김광철(金光轍)의 딸이다. 이복형으로 허성(許筬)이 있고, 동복형제로 허봉(許篈)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있다.
[생애]
21세인 1589년(선조 22)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1594년(선조 27)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597년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고, 이듬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가 서울의 기생을 가까이 한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후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형조좌랑을 거쳐 1602년 사복시정을 지냈으며,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4년에는 수안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1606년(선조 39) 명(明)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문장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모두 파직되었다.
1614년(광해군 5)에는 천추사(千秋使)로, 그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1617년에는 좌참찬이 되었으나 이듬해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동료들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활동사항]
1596년에 강릉부사 정구(鄭逑)와 함께 『강릉지(江陵誌)』를 엮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대관령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를 보고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를 지었다.
[학문과 사상]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서 배웠고,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허균은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문인으로서도 소설작품·한시·문학비평 등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저술]
문집으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가 있으며,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을 남겼다. 이 외에 『고시선(古詩選)』·『당시선(唐詩選)』·『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을 남겼는데 전하지는 않는다.
[작품]
조선시대의 대표적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남겼다. 「홍길동전」에서는 적서차별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새로운 세계의 건설 등을 제안하였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2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