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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101
한자 鄭經世
영어음역 Jeong Gyeongse
이칭/별칭 경임(景任),우복(愚伏),하거(荷渠),승성자(乘成子),석중도인(石衆道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정룡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활동 시기/일시 1613년연표보기
아버지 정여찬
어머니 합천이씨
아내 진성이씨
출신지 경상북도 상주군 청리면 율리
성별
생년 1563년연표보기
몰년 1633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추증 의정부좌찬성
대표관직 이조판서|대제학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하거(荷渠)·승성자(乘成子)·석중도인(石衆道人). 조선 중기 여러 관직을 겸한 행정가이며 중앙과 지방행정에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관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상주에 도남서원을 세우는 등 예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하게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유가적 학문관을 견지하여 강릉부사를 재임하면서 흥학비가 세워질 정도로 지방예학의 진흥에도 진력하였다.

[가계]

부친은 좌찬성을 역임한 정여관(鄭汝寬)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8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1586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8년에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과 통사랑대교로 승진하였다. 1596년 이조좌랑, 영남어사, 홍문관교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좌승지 4월에 경상감사로 나갔다. 1600년 영해부사, 1607년 대구부사, 1609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병부에 글을 올려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교섭하여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그 해 10월 나주목사, 12월 전라감사로 영전되었으며, 1613년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왔으며, 1623년 3월 홍문관부제학으로 제수되고, 대사헌, 승정원도승지, 의정부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인재를 널리 취하는 등 국정에 최선을 다하였다.

[활동사항]

강릉부사로 1613년 4월에 왔다가 1615년 9월까지 재직했다. 생존 시 관아에 사우를 세우다 불행히 중도에 그만 두었으나 1823년 순조 계미년에 연곡면 퇴곡리우복사를 건립하였다. 이를 일명 도동사(道東祠)라 하며 박돈검·신석필 등이 주도하였다. 권필교·최하현이 옮겨서 지을 것을 주장했고 성조유사인 권유교·최동현과 사림유사인 심지간·김계례가 주도하였다. 1833년 화재로 강당이 탄 것을 1848년 다시 세웠으며 1868년 11월에 철폐하고 위판은 우복사 뒷산에 묻었다.

[학문과 사상]

주자학 경전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평소에 주자를 흠모하였다. 따라서 주자퇴계를 평생의 모범으로 삼고 이들의 학설을 많이 따랐다. 그가 쓴 『양정편(養正篇)』과 『주문작해(朱文酌解)』는 주자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후진교육이나 경연에서 강의할 때 주자의 견해를 적극 밝히고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이황의 『주서절요』를 인용하였다.

정경세는 경전에 밝고 예학을 소중히 여겨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재직하면서 유시문을 내려 지역의 위례패속(違禮敗俗)을 고치게 하자 강릉향교 홍문 안에 권학흥교비(勸學興敎碑)가 세워졌다. 강릉에 세운 우복사의 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이 계축년(1613) 봄에 우리 고을에 부임 그 행정에 풍속을 교정하는 일을 선무(先務)로 하시고 곧 모든 선비를 초치하사 "혼상(婚喪)은 예 중에도 중대한 것인데 이곳은 문헌지방(文獻之邦)이면서 혹 위례하는 절목이 있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하시고 2~3명의 선비와 더불어 가르침의 방책을 설정하고 『효경』, 『소학』을 힘써 가르치며 미진한 몇 개 절목을 평정(評定)하니 고을의 혼상에서 그릇된 일들이 거의 바르게 되어 민속이 돈후하고 예교가 갖추어졌으니 선생의 가르침이 크도다. 우리 고을 선비 있음은 오래로되 교수하는 방법도 오히려 진흥치 못하였더니 다행히 선생에게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그 어찌 선생의 권학흥교의 뜻을 감히 잊으리오. 어리석은 나는 감히 적노라. 선생의 휘는 경세요, 자는 경임이요, 호는 우복이니 진양인이시다. 무공랑 전행공릉참봉 김지안(金志顔) 근서 통훈대부 전행강서현령 이상빈(李尙馪) 근찬.”

[저술]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강릉부사를 역임하면서 예학에 밝고 교화로써 다스려 지역 사류의 호평을 받았다. 생존 시 강릉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生祠堂)인 도동사를 세울 정도였으며 사후에 추모의 열기를 더해 연곡면 퇴곡리에 퇴곡서원과 우복사를 세웠다.

후에 정경세가 억울하게 죽은 진이서낭당을 세워준 설화와 관련된 연곡현감의 관탈민녀형 설화가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진이서낭당 내부에는 정경세 내외와 진이의 영정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20 2011 한자 최종 검토 무공즉 전행공릉참봉 김지안(金志顔) 근서 ->무공랑 전행공릉참봉 김지안(金志顔)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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