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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4003
한자 戶長
영어음역 Hojang
영어의미역 Village Chief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박도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983년(성종 2)연표보기
소속관서 주부군현
정원 주부군현은 1,000정(丁) 이상일 경우 8명, 500정 이상은 7명, 300정 이상은 5명, 100정 이하는 4명|양계지방은 1,000정 이상은 6명, 100정 이상은 4명, 100정 이하는 2명.

[정의]

고려와 조선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

[개설]

나말여초 지방의 지배층인 호족의 전신이다. 신라 말에 이들은 중앙의 상대등(上大等) 이하의 관제를 본떠 당대등(堂大等)·창정(倉正)·병정(兵正) 등의 직제를 구성했다. 고려 건국 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향리제도도 점차 정비하여 983년(성종 2) 당대등을 호장으로 개칭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토호적(土豪的) 존재로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屬縣)을 직접 다스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법체계에서는 이들의 신분을 중인층으로 고정하여 신분상승의 기회를 박탈하였으며 지방관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아전으로 격하하였다.

[제정배경 및 목적]

고려 초 지방통치체제 확립을 통한 중앙집권화정책의 일환으로 신라시대부터 지방에 세력을 떨치던 성주나 호족을 그대로 포섭하여 호장으로 개편한 데서 비롯되었다.

[담당직무]

호장은 수령을 도와 전세·요역·공납 수취 등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호장은 관노비를 관리했기 때문에 관노비의 재주(財主)로서 등기되어 있었다. 호장은 그들이 작성하는 공문서에는 호장인신(戶長印信)을 반드시 사용하였는데, 인신은 향리의 수반인 수호장(首戶長)만이 사용하였다. 이들은 수령의 유고시에 그 역할을 대행하기도 하였다. 호장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매년 정초, 국가 또는 왕실의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때 그 주현을 대표하여 예궐숙배(詣闕肅拜)하는 것이었다. 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직접 지방의 사정을 묻기도 했다.

또한 호장은 그 지방의 공동의 수호신을 모시면서 매년 제사를 주관하였다. 강릉 단오제를 주관한 것도 바로 호장들이었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의하면, “매년 4월 보름에 강릉부에서 임명된 호장(戶長)이 남자와 여자 무당을 인솔하고, 대관령 정상에 있는 신령을 모신 사당으로 가서 호장이 먼저 사당 앞에 나가 고유(告由)하고, 남자와 여자 무당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나무 가운데에서 신이 내린 나무를 찾아 모시고 오라 시키면 갑자기 나무 하나가 미친 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이 나뭇잎이 저절로 흔들리면 마침내 신령(神靈)이 그 나무에 내린 것으로 알고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건장한 장정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고는 이를 국사(國師)라 하였다. 이를 받들고 행차를 할 때에는 뿔로 만든 아름다운 피리를 불며 앞에서 인도하고 남녀 무당들은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면서 이를 따른다. 호장(戶長)은 대창역의 말을 타고 뒤에서 천천히 가면 이를 구경하기 위하여 연도에 늘어선 인파가 마치 담장을 길게 쌓은 것 같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관등체계상의 특징]

향리는 본관 지역에 임명되었으며, 그 직제는 크게 호장층(戶長層)·기관층(記官層)·색리층(色吏層)으로 구분된다. 향리의 승진코스는 색리층→기관층→호장층의 향직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적인 승진의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가문의 영향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관련기록]

조선 초기 강릉대도호부의 대표적인 향리는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 성씨조에 전(全)[정선래(旌善來)], 이(李)[평창래(平昌來)], 원(元)[원주래(原州來)] 등이 확인되며, 속현이었던 연곡현에서는 전(全)[정선래(旌善來)]이 확인된다. 이들은 모두 여말 선초에 정선·평창·원주 등지에서 이주해 온 성씨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서 확인되는 향리들이 비록 당시 신분상의 차별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이르면서 중인의 신분으로 고착되어 갔다.

[변천]

조선 초기까지 향리는 재지사족과 신분상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상호 간에 통혼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1413년(태종 13) 8월에 완성된 「강릉향교 중수기」에 의하면 강릉향교의 중수과정에 적극 동참하였던 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품관과 향리는 동등한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품관은 행정적으로도 향리와의 유착 관계에서 상하 명령 관계로 변모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변화는 품관과 향리의 역학구도의 재편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품관·향리의 역학 관계가 붕괴되고, 품관이 신분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향리의 행정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품관 주도의 지배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호장은 단순히 행정 조직의 말단에서 업무를 보좌하는 위상에 머문 것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 호족들이 지방 사회를 자치했던 위상을 계승하여 향촌 질서를 주도했다. 그들은 대개 호족의 후예로서 중앙 정부로부터 직역과 토성(土姓)을 분정받고 그들 조직인 읍사(邑司)에 참여하면서 행정적으로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한편, 지역사회를 자율적으로 지배하고 질서 유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성황신이나 산신 같은 향촌 공동체의 수호신의 제의를 주재하기도 하였고, 향도(香徒)와 같은 불교 신앙조직도 주도하면서 호장이 중심이 된 향촌 사회 운영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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