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4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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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李東圭之閭 |
영어음역 | Hyoja Yi Donggyu Jiryeo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Yi Donggyu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1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호민 |
성격 | 효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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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단층 와가 맞배지붕 |
건립시기/연도 | 1823년(순조 23) |
관련인물 | 이동규(李東奎) |
비두재질 | 화강석 |
비좌재질 | 화강석 |
비신재질 | 오석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위촌1리[마을회관 옆] |
소유자 | 성주이씨 종친회 |
[정의]
이동규(李東奎)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효자각.
[개설]
이동규의 아버지 이선빈(李善彬)은 풍수에 조예가 매우 깊었다. 어느 해 한 상가(喪家)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는데, 그 묘자리가 공교롭게도 그 상가의 종인 개산(介山)의 아버지 묘자리와 가까웠다. 그러자 개산(介山)은 이선빈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이후 개산(介山)은 남몰래 이선빈을 독살하였다. 이동규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슬퍼하면서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필경 개산의 원한으로 아버지가 화를 당했음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상가에서 식사를 하는 가운데 국그릇에서 굉음이 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그릇은 온전하였다. 이동규는 이를 이상히 여기고서 개산을 관에 고발하였다. 그러나 개산이 완강히 부인하여 7대의 관백이 이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동규는 부친의 원한을 풀기 전에는 상을 벗지 않겠다 하여 상복차림으로 매일 같이 관에 읍소하면서 17년의 세월을 보냈다.
강원감사 유복명(柳復明)은 이동규의 애절한 사연을 접하고 그 처지를 가엾게 여겨 그간의 전후 문서를 살핀 뒤 개산의 죄상을 밝히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개산은 장형(杖刑)으로 처형되었다. 이동규는 개산의 배를 갈라 그 간을 씹었다 하며, 이후 처음으로 상복을 벗었다고 한다.
[건립경위]
강릉부사 유의양(柳義養)이 이동규의 효행을 계달하여 정려를 받았으며, 효행비는 1823년(순조 23) 후손 이심간(李心簡)과 이심범(李心範)에 의해 건립되었다.
[형태]
효자각 주위는 철제 담이 둘러져 있으며, 효자각은 단층 와가 맞배지붕으로 용문과 연화문양으로 단청되어 있다. 효자각 안에는 효자비가 있다. 효자비는 화강암 재질의 방형비좌 위에 오석 비신이 있고 그 위에 화강석 재질의 지붕돌[옥개석]이 있다.
[금석문]
비각 안에는 ‘효자이공동규정려비각기(孝子李公東奎旌閭碑閣記)’라는 현판이 있다.
[현황]
효자이동규지려는 성주이씨 종친회에서 소유와 관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