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최한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07
한자 崔漢公
영어음역 Choe Hangong
이칭/별칭 태보(台甫),고곡(考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423년연표보기
활동 1453년연표보기
활동 1459년연표보기
활동 1467년연표보기
활동 1469년연표보기
몰년 1499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화순(和順)
대표 관직 사간원정언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태보(台甫), 호는 고곡(考谷). 증조할아버지는 최원지(崔元之), 할아버지는 중부령을 지낸 최자강(崔自江)이며, 아버지는 좌찬성 최선문(崔善問)이다. 어머니는 김명리(金明理)의 딸이다. 부인은 정몽주(鄭夢周)의 손녀이다. 5남 4녀 중 장남으로 동생 최한후(崔漢侯), 최한백(崔漢伯), 최한번(崔漢藩), 최한남(崔漢南)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생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은 이들 형제들과 하로의 하곡리를 ‘오자등과방(五子登科坊)’라 일컬었다. 최한공의 딸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열녀로 정려되었다. 1593년 2월 선조는 ‘욕을 당하지 않고 자결한 최한공의 딸을 포장하라’는 비변사의 장계를 받아들여 경상도관찰사에게 포장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최한공의 가문은 김천의 대표적인 명문 집안을 이루었다.

[활동 사항]

최한공(崔漢公)[1423~1499]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7세에 이미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때 아버지는 사헌부지평으로 관직에 잠시 나아갔다가 다시 향리에 은거함을 반복하였는데, 이러한 아버지를 통해 학문을 배웠다. 향리에 머물던 아버지가 1451년(문종 1) 공조판서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에 고무되어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용교위(進勇校尉)가 되었으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아버지의 낙향으로 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1456년(세조 2)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손들을 불러 모아 “형은 화애하고 동생은 공손함이 가정의 화평이요, 성인의 훈계는 분명 떳떳한 도리를 도우리. 우리 최씨 세세의 덕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성관(成冠)을 하사받을 때 일을 모름지기 보거라.”는 경계문(鏡戒文)을 내렸다. 최한공과 형제들은 이 말을 명심할 것을 다짐하였고, 함께 3년간 여막 생활을 하면서 지극한 효성과 우애를 보였다. 상기가 끝나고 37세가 되던 1459년(세조 5)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얻었다. 경상도사·칠원군수·풍기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전한을 거쳐 1467년(세조 13)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최한공은 의금부낭관을 겸하고 있으면서 대신인 신숙주(申叔舟)의 형구를 허소(虛疎)하게 한 혐의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신숙주의 항쇄(項鎖)가 너무 좁아서 한 모금의 물[勺水]도 마시지 못하여 항쇄를 늦추어 주었다고 대답하였고, 세조는 인군을 업신여기고 신하에게 아부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의금부에 투옥시켰다. 그러나 곧바로 풀려났으며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467년 12월 사간원정언으로서 강효문(康孝文)이 횡렴(橫斂)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여 오로지 권세가(權勢家)를 섬기면서 군민(軍民)의 원망을 사서 드디어 난(亂)의 근본이 되었으므로 탄핵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조는 사람을 보내어 국문(鞫問)하면 민간(民間)을 소요스럽게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1468년(세조 14) 6월 세조는 사간원에 구언(求言)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최한공이 올린 소의 문구 가운데 관로를 문란하게 한 내용이 있다 하여 추국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돌을 운반한 통찬(通贊)과 경서(經書)를 부르는 주부(主簿)’라는 글귀였으며, 정중(庭中)에 묶어다가 장(杖)을 때리려 하자 최한공은 아우에게 들은 말이라고 대답하여 세조가 정대하지 못하다면서 분노하였는데, 이 일로 예승석(芮承錫)과 함께 옥에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468년 9월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은 사간원정언인 최한공을 국장도감의 낭관으로 참여시켰다. 1469년(예종 1) 사헌부에서 언로를 밝힐 것을 청하자 예종은 사간원의 관원들을 불러 사헌부에서 말한 안철손(安哲孫)이 기생과 간음(奸淫)한 일에 대해 물었다. 이 과정에서 대간들이 모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였고 그중에 심한 자로 최한공과 정휘가 지목되어 파직되었다.

얼마 뒤 풀려나 승문원권지교리(承文院權知校理)가 되었고, 형조의 체류된 옥수(獄囚)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정낭관이 되어 기일을 정해 판결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후 신병과 모친의 봉양을 구실로 벼슬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학문과 시문에 전념하였다.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등 영남의 신진 사류들과 사귀면서 학문과 시폐를 논하였다. 산수를 좋아해서 친구들과 절경을 찾아 시주(詩酒)로 소일하기도 하고, 서당을 세워 후진을 계도하는 데도 힘썼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묵방골[墨坊谷]에 부인의 묘와 함께 있으며, 오른쪽에는 아버지의 묘가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