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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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龜東祠 |
영어음역 | Gudongsa |
영어의미역 | Gudong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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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844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
소유자 | 평해황씨 문중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있는 황이후, 황세기, 황재중, 황윤석, 황수경을 제향하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구동사는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사우로 1844년(헌종 10)에 창건하여 황이후(黃以厚), 황세기(黃世基), 황재중(黃載重), 황윤석(黃胤錫), 황수경(黃秀瓊)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황이후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창의한 선비로, 자는 구이(久而), 호는 안촌(安村)으로, 1589년(선조 22)에 조동에서 출생하였다. 충의가 탁월하고 지인(智仁)을 겸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 함써 의병과 군량을 모아 병영에 보내었고, 정묘호란 때에 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황세기는 조선 후기 학자로 자는 자평(子平), 호는 취은(醉隱)이며, 1628년(인조 6)에 조동에서 출생하였다. 기진탁(奇震鐸)의 문인으로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고 용략(勇略)이 출중하며, 학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효종 때에 송시열과 도의로 교유하고 있었는데, 숙종 때에 송시열이 대왕대비의 복상 문제로 반대파에게 화를 당할 때에 그에게도 화가 미쳤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황재중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원숙(元叔), 호는 구암(龜巖)이며, 1644년(현종 5)에 조동에서 출생하였다. 기정익(奇挺翼)의 문인으로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사(賜死)를 받아 세상을 떠나자 기정익은 분곡(奔哭)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추산(秋山)에 조두(俎豆)를 올렸다. 뒤에 사화가 일어나자 은거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황윤석은 조선 후기 유학자로 자는 영수(永叟), 호는 이재(頤齋), 서명산인(西溟散人), 운포주인(雲浦主人), 월송외사(越松外史)이며, 1729년(영조 5)에 성내면 조동에서 출생하였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1759년(영조 3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66년(영조 42)에 은일(隱逸)로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뒤이어 사포서(司圃署)의 직장, 별제를 거쳐 익위사의 익찬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779년(정조 3)에 목천현감이 되었다가 다음해 사퇴하였고, 1786년(정조 10) 전생서(典牲署)의 주부를 거쳐 전의현감(全義縣監)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에 사퇴하였다.
황윤석은 실학의 학풍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는데, 처음에는 이학(理學) 공부에 힘쓰고 『주역(周易)』을 비롯한 경서의 연구도 하였으나, 북경을 거쳐서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소개한 공이 크고, 또 종래의 이학과 서구의 새 지식과의 조화를 시도한 점이 특색이다. 저서로는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수신편(理藪新編)』, 『자지록(恣知錄)』이 있다. 이중 『이재유고』에 「자모변(字母辨)」,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 등이 있어 국어학사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운학에 대한 연구 내용은 『이수신편』에 실려 있다.
황수경은 조선 후기 학자로 자는 경옥(景玉), 호는 단옹(檀翁)이고 1781년(정조 6)에 조동에서 출생하였다. 자질이 뛰어나 약관에 백가서(百家書)를 섭렵하고 문장덕행(文章德行)으로 이름이 높아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특제(特除)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위치]
성내면 조동리 조동마을 앞길 건너편에 있다.
[변천]
1844년(헌종 10)에 창건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58년 중건하였으며 중·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황]
2010년 현재 관리자는 평해황씨(平海黃氏) 안촌공 종중이고 제사일은 음력 9월 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