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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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彦觀 |
영어공식명칭 | Gi Eonkwan |
이칭/별칭 | 백첨(伯瞻),약천재(藥泉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헌납, 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기언관(奇彦觀)[1706~?]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백첨(伯瞻), 호는 약천재(藥泉齋)이다. 고봉 기대승(奇大升)의 6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기욱(奇頊), 할아버지는 기진열(奇震說), 아버지는 기정후(奇挺後)이다. 기언관의 부인은 민세로(閔世魯)의 딸 민씨(閔氏)이며, 세 아들을 두었는데, 차례대로 기학덕(奇學德), 기학순(奇學淳), 기학경(奇學敬)이다.
[활동 사항]
기언관은 1706년(숙종 32) 광주 지역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의 후예로서, 39세가 되는 1744년(영조 20)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언관이 치른 춘당대시는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 임시로 시행된 과거로, 임금이 친히 창경궁(昌慶宮) 춘당대(春塘臺)라고 하는 곳에 나와 진행된 만큼 의미가 있는 시험이었다.
그런데 『영조실록(英祖實錄)』의 기록을 보면, 기언관은 문과에 급제한 그해에 종성(鍾城)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예문관의 검열을 채용하기 위해 임금 앞에서 시행되는 소시(召試)에 응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조는 기언관이 기대승의 후손임을 알고는 어필로 특별하게 한권(翰圈) 2점을 더해 주었는 데도 기언관이 소시에 응시하지 않은 것에 분노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46년(영조 22)에 방송(放送)된 기언관은 무려 22년 뒤인 1768년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1771년(영조 47)에는 이일증(李一曾)과 더불어 정도(正道)를 지키지 않는 사례로서 지목되었다.
1780년(정조 4)에는 인재 수습의 뜻에서 기언관의 품계를 올려 채용하라는 상소가 보이는데, 이처럼 기언관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광주읍지』나 『호남인물지』에는 기언관이 일찍이 기대승의 묘소 부근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산림에서 즐거움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