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41 |
---|---|
한자 | 奇學敬 |
영어공식명칭 | Gi Hakkyeong |
이칭/별칭 | 중심(仲心),겸재(謙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사간원헌납, 무장현감,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기학경(奇學敬)[1741~1809]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중심(仲心), 호는 겸재(謙齋)이다. 기대승의 7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기진열(奇震說), 할아버지는 기정준(奇挺浚), 아버지는 헌납, 사간 등을 역임한 기언관(奇彦觀)이고,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이다.
[활동 사항]
기학경은 1741년(영조 17) 광주 지역에서 태어났다. 1783년(정조 7) 식년시에서 진사에 입격하였고, 8년 뒤인 1801년(순조 1)에 증광시에서 병과 4위[전체 14위]를 차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기학경의 나이 61세였다.
기학경은 과거 급제 이듬해인 1802년(순조 2) 왕에게 지켜야 할 7개의 조항을 정리하여 제출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칠조소(七條疏)’로, 그 내용은 첫째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할 것, 둘째 기강을 진작시킬 것, 셋째 인재를 얻을 것, 넷째 폐단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작은 현(縣)을 혁파할 것, 여섯째 구임(久任)을 책임 지울 것, 일곱째 군정(軍政)을 정비할 것 등이다. 이를 받은 순조는 기뻐하며 비답(批答)[신하가 올린 상소나 차자 등에 대해 국왕이 내린 답서]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그 후 무장현감(茂長縣監),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안과 밖을 드나들며 다양한 관직 생활을 경험하였던 기학경은 1809년(순조 9)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겸재집(謙齋集)』은 기학경의 유고를 모아 정리한 문집으로,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후손 기세철(奇世哲)이 간행하였다. 전체 8권 2책의 연활자본으로, 권말에 기학경의 7세손인 기남종(奇南鍾)의 발문이 있다. 시(詩), 서(書), 소(疏), 변(辨), 제문(祭文) 등의 다양한 글과 기학경의 행장, 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02년(순조 2) 올린 ‘칠조소’의 전체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있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의 과정과 자신의 해석을 밝힌 「퇴고양선생사칠이기전말(退高兩先生四七理氣顚末)」을 비롯한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문학상이나 사회상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