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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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彦鼎 |
영어공식명칭 | Gi Eonjeong |
이칭/별칭 | 중화(仲和),정간(靖簡),국진(國鎭),나와(懶窩),양익재(兩益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공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낸 문신.
[가계]
기언정(奇彦鼎)[1716~1797]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국진(國鎭)·중화(仲和), 호는 나와(懶窩)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기원(奇瑗), 할아버지는 기진열(奇震說)이다. 아버지 기정후(奇挺後)와 어머니 나천추(羅天樞)의 딸 나주나씨(羅州羅氏) 사이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인은 양몽뢰(梁夢賚)의 딸 제주양씨(濟州梁氏)이다.
[활동 사항]
기언정은 기대승의 후손으로 1716년(숙종 42)에 태어났다. 기언정의 가문은 대대로 광주 지역에서 살았다. 기언정은 1763년(영조 39) 48세에 증광시에서 병과 41위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1771년 정언(正言)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82년(정조 6) 왕이 특별하게 기언정을 초자(超資)[관직의 차례를 건너뛰어 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던 일]하여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하였다. 1786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1792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등의 직을 역임하였고, 1795년(정조 19)에는 공조의 으뜸 벼슬인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올랐다. 비록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입문하였으나, 관력(官歷)은 순탄하였다.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에는 기언정이 “정주(程朱)[중국 송의 유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와 주희(朱熹)를 일컫는 말]의 성리학에 종사하여 자수(自手)로 써서 음통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학문과 저술]
기언정은 이규량(李奎亮), 고득겸(高得謙), 조경(趙璥), 김종수(金鍾秀) 등과 교유하였다. 『나와집(懶窩集)』은 기언정의 문집으로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기언정의 5대 후손인 기동필(奇東弼)과 족질(族姪)인 기헌섭(奇憲爕) 등이 간행하였다. 기언정 사후 아들 기학중(奇學中)이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작성하였고, 이후 후손들의 유고 정리 사업이 계속 있었다. 전체 10권 4책의 목판본으로, 송병순(宋秉珣)의 서문을 비롯하여 기언정 후손들의 발문이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