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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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梧峙洞盤龍採菊契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인서 |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있었던 협동 단체.
[설립 목적]
오치동 반룡 채국계(梧峙洞 盤龍 採菊契)는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에서 결성되었다.
[변천]
오치동 반룡 채국계는 1933년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을 위하여 이계종(李啓琮)이 동료, 제자들과 스승의 지우(知友) 등을 모아 창계하였다가, 1968년 김진현 사후에 소멸하였다.
[내용]
계원은 성년이 된 운파(雲坡)의 문인과 친우들로 구성되었는데, 창계(創契) 시 300명이 넘었고 거주지는 주로 서방·오치 지역이었다.
임기 2년의 고문, 계장, 부계장, 직월, 간사가 있었고, 상임직 고문은 스승과 스승의 친우 등 2명, 계장 2명을 두었다. 부계장 2명, 직강 3명, 10명 내외의 간사를 두는 등 계원 수가 많아 임원직이 여타의 계보다 많았다.
채국계의 강신일[총회]은 매년 음력 9월 10일이었다. 강신일이 되면 20여 명의 유사(有司)[친목계나 모임의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가 200명 이상 참석하는 계회의 음식을 각자의 자비로 분담하여 준비한다.
채국계도 강의계와 유사하게 스승을 받들고 교제를 넓히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운(韻)에 맞춰 시구(詩句)를 읊는 장을 본계의 중요한 대목으로 여겼다. 이 자리에서 직강에 의해 한시 짓는 법이 강의되었고, 시문을 써서 주고 받으며 필력(筆力)을 향상시키고 우의를 다졌다.
채국계 역시 창계(創契) 시에는 20전, 해방 이후에는 30원씩의 계비를 갹출(醵出)[같은 목적을 위하여 여러 사람이 돈을 나누어 냄]하는 등 최소 운영 비용만을 거두었을뿐 계원에 대한 상조 기능은 없었고 계원 상호간의 개인적인 부조(扶助)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