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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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邑城西門光利門 |
이칭/별칭 | 서문,광리문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경 |
원소재지 | 광주읍성 서문 광리문 - 광주광역시 동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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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성문 |
[정의]
[개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도류와 문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광주읍성 서쪽은 '광리문(光利門)'이라는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광주읍성 서문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은데, '광(光)'은 광주를 의미하고, '리(利)'는 주역(周易)에서 원형리정(元亨利貞) 중 서쪽 방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위치]
서문길은 현재 황금동 콜박스 사거리 또는 황금동 옛 미국공보관 사거리에 있던 서문을 기점으로 한다. 광리문[서문]을 통과하여 남구 대촌동을 지나 남평현, 나주목으로 연결되었으며, 전라남도 남부 지역과 연결되었다. 서문 광리문과 광주읍성 동문 서원문을 이은 길에는 광주동부경찰서, 전일빌딩, 광주 우체국 등이 있다.
[변천]
광주읍성 4대문 가운데 광주읍성 서문 광리문은 비교적 일찍 사라졌다. 1900년대 일본인들이 광주 시내에 들어와 서문 주변에 정착촌을 만들면서 통행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광리문 일대에는 일본인들의 유곽과 술집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재까지 광리문 안팎인 황금동과 불로동 일대에 유흥가가 밀집하여 있는 것은 이때의 영향이다.
[형태]
광주읍성 성곽의 형태를 살펴보면 『지승(地乘)』, 『광여도(廣輿圖)』,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輿地圖』, 1872년 지방지도 등의 고지도에서 광주읍성은 방형으로 그려져 있다. 광주읍성에는 동서남북을 향한 성벽의 중앙에 각각 1개씩 4개의 문이 있었다. 문(門)의 형태에 대해 살펴보면, 『해동지도』는 광주읍성 사대문 모두를 홍예문처럼 그렸다. 그 외 서문 광리문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고 있다. 서문 광리문과 광주읍성 동문 서원문의 편액 글씨는 최종기(崔宗岐)가 썼다. 최종기가 본래 글씨를 잘 썼다는 사실은 『광주읍지』에도 나온다.
[현황]
광주읍성 서문 광리문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현 광주역사민속박물관]이 1997년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과 남동 일대에서 발굴 조사하면서 수습한 석재들을 이용하여 현재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재현하여 놓았다.
[의의와 평가]
1896년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목 관아터가 들어서면서 광주읍성 내의 건물과 그 기능이 변화하였다. 일제강점기 서문 광리문의 안과 밖의 변화상을 연관지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