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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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71年大統領選擧 |
이칭/별칭 | 1971년 대선,7대 대선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개설]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와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대결하여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가 득표율 53.2%로 당선되었다.
[역사적 배경]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연임을 2회까지로 제한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1971년에 열리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이때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국회 의석 수가 129석으로 2/3가 넘어 헌법 개정이 가능하였고, 따라서 여당의 헌법 개정을 거치면 박정희의 재출마는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공화당 출신 김종필이 박정희를 이을 차기 대선주자로 떠올랐고, 박정희의 3선을 반대하였다. 이에 분노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 내 개헌을 주장하던 국회의원들에 의해 김종필을 당에서 제명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박정희의 3선 출마를 위한 헌법 개헌은 야당 신민당에 의해 본회의 상정에 실패하다가 민주공화당 의원들의 날치기 통과로 인해 국회를 통과하였고,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이 확정되었다.
[경과]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에서는 김영삼이 1969년 11월 8일, 김대중이 1970년 1월 24일, 이철승이 1970년 2월 12일에 각각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투표에서 이철승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이 458표, 김영삼이 410표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이 지명되었다.
[결과]
1971년 대통령 선거 투표 결과, 약 95만 표 차이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제7대 대통령 선거로 인해 형성되던 반여 정서는 전라남도 신안 출신의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더욱 심해졌고, 박정희 쪽에서도 호남에서 영남 물품을 불매하기로 하였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하여 영남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등 지역 감정이 격해졌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등장한 김대중에게 예상 외의 접전으로 간신히 이기고, 1971년 5월 25일에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이 89석을 확보하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10월유신(十月維新)'을 일으켰다.
[의의와 평가]
박정희, 김대중 두 후보의 표 차이는 결코 적지 않았으나 그 과정에서 부정선거와 지역 감정이 조장되었다. 서울·경기도·전라도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낮게 나왔는데, 그중 2배가량 차이가 나는 지역은 광주를 포함한 전라도뿐이었을 만큼 지역 감정이 격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