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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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湧珍精舍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혜영 |
건립 시기/일시 | 1917년 - 용진정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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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2월 25일 - 용진정사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 |
현 소재지 | 용진정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 |
성격 | 정사 |
양식 | 한식기와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2칸 |
문화재 지정 번호 |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정사.
[개설]
용진정사는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1851~1931]이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며 민족정신을 함양시킨 곳이다. 오준선은 현재의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오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吳泰圭)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고, 18세 때에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배우며 이를 계기로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등의 당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뿐만 아니라 오계수(吳繼洙), 나도규(羅燾圭), 기우만(奇宇萬), 박노술(朴魯述), 정의림(鄭義林) 등 호남 지방 기정진의 문인을 비롯한 많은 인물과 교유하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체계를 다졌다.
용진정사는 원래 용진사(聳珍寺)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청안이씨(淸安李氏) 소유의 선산이었다. 청안이씨 이창석(李彰錫)의 모친이 오준선의 뜻을 듣고 절터의 일부를 내주어 건물을 짓게 되었다. 1916년 음력 9월 1일 자로 땅을 매입한 오준선의 제자들은 곧바로 교육공간을 짓기 시작하여 1917년 봄에 완성하였다.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서로 180-68[왕동 3-1]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처음에는 잠시 석남정사(石南精舍)라 불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용진정사로 변경하였다. 다만 용진정사로 이름을 바꾼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용진정사기』 중에 ‘선생몰금사십년(先生歿今四十年)’이란 내용을 보아 1919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오준선이 죽은 뒤 제자들이 강당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을 세우고 1924년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 벽에는 오준선의 큰아들 오헌수와 둘째 아들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 있다.
[형태]
용진정사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한식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
1985년 2월 25일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오준선의 제자들은 용진정사의 건립과 『후석유고(後石遺稿)』, 『용진지(聳珍誌)』 발간, 영당 건립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스승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였다. 오준선의 제자들은 대체로 전남 서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오준선은 전남 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