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67
한자 吳東洙
영어공식명칭 Oh Dongso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문다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오동수 용진정사 건립
사당|배향지 용진정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산3-2 지도보기
성격 문인·학자
성별
본관 금성(錦城)

[정의]

근대기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문인·학자

[가계]

오동수(吳東洙)[?~?]의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할아버지는 오하규(吳夏圭), 아버지는 오영선(吳泳善)이다.

[활동 사항]

오동수의 출생과 활동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아버지 오영선이 일찍 사망하자 오영선의 형 오준선(吳駿善)[1851~1931]이 오동수를 양육하였다. 오준선은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말년에 제자로 들어가 학문을 계승하였으며, 위정척사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운동에 관여하였으며, 여러 의병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의병전(義兵傳)』을 저술하였다. 1917년 용진정사(湧珍精舍)[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를 건립하여 은거한 뒤 후학 양성에 매진하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용진지(聳珍誌)』에 따르면, "오준선은 나주를 비롯한 장성·함평·광주·무안 출신의 문인 632명을 배출하면서 나주오씨 문중의 스승이자 전라남도 서부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후학 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오준선의 행적은 오동수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오동수의 행적은 전라남도 광주 인근 지역에 산재한 오동수의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데, 1935년 고광수(高光洙) 등 33명과 함께 병천사(秉天祠)[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에 배향할 인물을 정하는 일로 봉산정사(鳳山精舍)[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산사]에서 회합을 하자는 통문에 오동수의 이름이 확인된다. 오동수는 금성오씨 재각인 덕호재(德湖齋)[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에서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학문과 저술]

『난파유고(蘭坡遺稿)』에 수록된 해남군수(海南郡守) 정석진(鄭夕珍)[1851~1896]의 「토평일기」에는 오동수가 1913년에 작성한 발문(跋文)이 실려 있으며, 오준선의 시문집인 『후석유고(後石遺稿)』에는 오동수가 1931년에 쓴 가장(家狀)이 실려 있다. 이 밖에도 덕호재의 찬기와 '효자김공기삼기적비', '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耽津崔氏四孝二烈旌閭)' 비문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용진정사(湧珍精舍)[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의 용진영당에는 1924년 채용신이 그린 오준선의 초상화와 함께 좌우벽에 오헌수와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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