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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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駕鶴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원사호길 55-43[사호동 457-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현숙 |
건립 시기/일시 | 1601년 - 가학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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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2007년 - 가학정 멸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5년 - 가학정 중건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9년 - 가학정 재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12년 - 가학정 재건 |
현 소재지 | 가학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원사호길 55-43[사호동 457-2] |
원소재지 | 가학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원사호길 55-43[사호동 457-2] |
성격 | 누정 |
양식 | 육각형 정자|육모지붕|겹처마 |
정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죽산박씨 문중 |
관리자 | 죽산박씨 문중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개설]
가학정(駕鶴亭)은 죽산박씨 중시조인 죽림(竹林) 박경(朴璟)이 임진왜란 후 용진산에 세운 정자이다. 1935년에는 박경의 후손 박동춘이 가학정을 재건하였는데, 당시에는 가학정 중건에 관한 사연과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염제(念齋) 송태회(宋泰會)[1872~1941]의 대서현판과 박동춘(朴東春)의 시, 노탄(老灘) 송규헌(宋奎憲)의 중건기 편액이 있었고 기둥에도 주련이 걸려 있었으나, 2007년 풍수해 이후 복원되어 현재는, 송태회의 대서현판 1장만 걸려 있고 중수기 등은 사진 6장으로 전한다.
[건립자 박경의 활동]
박경은 임진왜란 시기에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의 종사관으로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의 벼슬을 제수(除授)받아 의곡을 모아 운반하고, 선조 임금의 피난 북행길에 호종하였다. 노탄 송규헌의 중건기 기록을 보면 “난이 끝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조가 크게 임용하려 불렀으나 처사는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충심(忠心)으로 한 일이므로 한가한 강호에 돌아가기를 청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선조는 ‘죽림거사’라는 시호와 궤장을 내려 박경의 명예를 드높였다.”라고 적고 있다. 그 후 박경은 풍광이 좋은 용진산 북쪽 산 중턱에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닌다’는 뜻의 가학정을 건립하였다. 이때, 우측에 강학의 공간으로 성성재(惺惺齋))를 함께 건립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동생 박종(朴琮), 박종의 손자인 박진빈(朴晉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3대가 나라에 충절을 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50년에는 강 건너에 죽림정을 세웠다.
[위치]
가학정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사호동 용진산의 동쪽 8부 능선에 있다. 임곡동 삼화교를 지나 왼쪽 비포장 뚝방길로 가다가 삼거리에서 청룡사 팻말을 지나 올라가는 곳에 있다.
[변천]
가학정은 1935년 박경의 후손 박동춘이 중건하였고, 1979년 후손들이 재중수하였다. 2007년 폭우로 멸실되었는데, 2012년 5월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에서 기존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형태]
가학정은 육각형 정자로 바닥 공간이 기둥과 마루로만 구성되어 있다. 원형 주초석 위에 6개의 기둥을 얹었으며, 육모지붕으로 부챗살 모양의 천장 서까래를 볼 수 있고, 겹처마에 골기와를 얹었다. 마루 끝의 난간은 아자(亞字) 문양과 운판(雲板) 문양을 투각으로 섬세하게 장식하였다. 본래 단청으로 단장되어 있었으나, 2012년에 복원하면서 단청은 칠하지 않았다.
[현황]
2012년 광주광역시 광산구청에서 가학정으로 가는 길을 넓혀서 접근하기가 수월해졌다.
[의의와 평가]
가학정은 산세와 풍광이 어우러진 한말 의병 전적지로 의미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