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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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庭篁 |
영어공식명칭 | Song Jeonghwang |
이칭/별칭 | 천경(天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교서관정자 등을 지낸 문신.
[가계]
송정황(宋庭篁)[1532~1557]의 본관은 홍주(洪州)이며, 자는 천경(天擎)이다. 할아버지는 송기손(宋麒孫), 아버지는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낸 통훈대부(通訓大夫) 송구(宋駒)이고,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이다. 부인은 김윤경(金允敬)의 딸 광산김씨(光山金氏)이며, 아들은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이다.
[활동 사항]
송정황은 1555년(명종 10)에 24살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인 1556년(명종 11) 별시(別試) 병과 3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송정황은 급제 후 외교 문서를 주로 관리·담당하는 승문원괴원(承文院槐院)에 발탁되었으나, 당시 척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과 뜻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용되지 않았고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지만, 이 역시도 나아가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송정황의 기록이 전혀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송정황은 벼슬길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고봉 기대승(奇大升)을 만나 학문에 눈을 떴다. 1557년(명종 12) 기대승이 저술한 『주자문록(朱子文錄)』의 편집에 참여하였고 발문도 작성하였으나, 바로 그해에 요절하였다.
『광주읍지(光州邑誌)』나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 등에는 송정황이 문장이 뛰어나 명성을 드높였으나 윤원형의 시기로 인해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송정황의 효우(孝友)를 높이 평가하여 시를 지었다.
[학문과 저술]
송정황은 고봉 기대승에게서 수학하였고, 하서 김인후 등과 교유하였다. 『정자송공유고(正字宋公遺稿)』는 1573년에 송정황의 시와 글을 모아 후손인 송재학(宋在鶴) 등이 간행한 시문집이다. 전체 3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고재붕(高在鵬)의 서문을 비롯하여 송시열(宋時烈)의 후서와 홍기섭(洪耆燮)의 발문 등이 확인된다. 1권은 시(詩), 부(賦), 발(跋)로 구성되었고, 2·3권은 만시(輓詩)를 필두로 세계원류(世系源流), 실록(實錄), 행장(行狀), 유사(遺事), 만사(輓詞), 우유당실기(優遊堂實記)·묘갈명(墓碣銘)·수옹실적(瘦翁實績) 등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