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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42
한자 六月抗爭
이칭/별칭 6월 민주 항쟁,6.10민주항쟁,6월 민주화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87년 6월 10일연표보기 - 6월항쟁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87년 6월 29일연표보기 - 6월항쟁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87년 1월 14일 -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87년 4월 13일 - 4.13 호헌조치
전개 시기/일시 1987년 6월 9일 -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87년 6월 10일~26일 - 6월항쟁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87년 6월 29일 - 6.29 민주화 선언 발표

[정의]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 운동.

[개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하여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민주화 투쟁이다.

[역사적 배경]

1985년 2월 12일에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는 전두환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84.6%가 넘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있었고,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로 인해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가고 있었다.

민주화에 대한 시위가 지속되던 1987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박종철은 1월 13일 자정쯤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공안당국은 수배 중이던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해 박종철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폭행 등을 가하였고 1월 14일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정부는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라고 발표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기 위해 국론을 분열시키는 개헌 논의를 지양하고, 민주정의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를 결정한다."라는 호헌을 발표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관련된 모든 논의를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접선거제[간선제]에 대한 개헌을 주장하였고,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접선거제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는 대통령 직접선거제[직선제]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는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5.18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축소·은폐되었으며 고문 경찰은 총 5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였다. 이로 인해 야당과 재야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고문 살인과 은폐 조작을 규탄하는 대규모 대회를 열었다. 또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1987년 6월 10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의 도시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경과]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전라남도 화순 출신의 이한열이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부상을 입고 끝내 7월 5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6월 10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2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고 박종철군 고문 은폐 규탄과 호헌철폐 국민대회'에 참여하여 "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금남로 진입을 시도하며 30여 차례 시위를 진행하였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결의대회'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6.18 최루탄 추방결의대회'를 전후로 10일간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서는 금남로 주변에 5만여 명의 광주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7월 9일, 고(故) 이한열 군의 운구 행렬이 연세대학교를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향할 때 광주 시민들은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7시로 예정된 전라남도청 앞의 노제에 참석하기 위해 군집한 시민들로 인해 서광주나들목 앞길까지 막혀 운구 차량이 금남로를 통과하는 데만 40분이 걸렸다.

불교계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구국법회',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어 목소리를 냈다. 교육계에서는 민중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민중교육지』에 실었는데 당국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교사들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교사들은 '민주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을 출범시켰고,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도 민주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지부가 결성되었다. 민주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 민주화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광주시와 전라남도였다.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는 대통령 직접선거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시국 수습을 위한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결과]

6월항쟁으로 대한민국은 군부 세력의 오랜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실현시킬 수 있는 대통령 직접선거제를 쟁취할 수 있었다. 또한 6월항쟁을 주도한 국민운동본부는 특정일에 의미를 부여하여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시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이끌었다. 6월항쟁이 지속되면서 시위에 참여한 많은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병영적 노동통제 등을 규탄하였다. 이후 노동 부문 민주화를 위한 '노동자대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의의와 평가]

6월항쟁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염원하던 민주주의를 국민 손으로 직접 이루어낸 사건이었다. 또한 시위에 참여하였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 부문 민주화를 위한 노동자대투쟁이 전개되었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투쟁은 타 지역보다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과 참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고등학생들이 나서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것은 매우 특이하다. 또한 광주 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의식을 딛고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해야겠다는 굳센 의지를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 『광주시사』 3(광주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5)
  • 서중석, 『6월항쟁』(돌베개, 2011)
  • 6.10민주항쟁(http://www.610.or.kr)
  • 이한열기념사업회(http://leememoria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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