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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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枾亭遺愛祠 |
이칭/별칭 | 유애서원(遺愛書院)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아로 460[흑석동 206]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한백 |
건립 시기/일시 | 1754년 - 시정유애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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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68년 - 시정유애사 훼철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 시정유애사 복원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5년 6월 20일 - 시정유애사에서 유애서원으로 개칭 |
현 소재지 | 시정유애사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아로 460[흑석동 206] |
성격 | 사우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흑석동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 문신 이신의를 모신 사우.
[개설]
시정유애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흑석동에 있으며, 조선시대 중기 문신인 석탄 이신의(李愼儀)[1551~1627]를 모신 사우이다. 이신의는 임진왜란 때 향군(鄕軍) 300명과 함께 왜군을 무찔렀으며,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후 광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와 영창대군 죽임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다시 광주목사를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송하던 중 병이 나서 죽었다. 1754년(영조 30) 호남 지역 유림들이 이신의를 기리기 위하여 사우로 건립하고 시정유애사라고 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문을 닫자, 서적과 거문고 유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1901년(고종 38) 금서재(琴書齋)를 건립하고, 1919년에는 금서재를 대신하여 경장각(敬章閣)을 지었다. 2000년 경장각 뒤에 시정유애사를 복원하여 이신의를 배향하였다.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아로 460[흑석동 206]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2005년 시정유애사에서 유애서원(遺愛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성균관(成均館)에 등록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
[의의와 평가]
광주목사를 역임한 이신의의 행적 및 이신의와 연관된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이후 어떻게 서원과 사우가 변화하였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