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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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觀鉉 |
영어공식명칭 | Gi Kwanhyeon |
이칭/별칭 | 대현(大現),청우(靑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기관현(奇觀鉉)[1837~?]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자는 대현(大現), 호는 청우(靑隅)이다. 기침(奇琛)의 7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기종민(奇宗敏), 할아버지는 기상천(奇商天), 아버지는 기사철(奇師轍)이다. 아들은 기승연(奇昇衍)이다.
[활동 사항]
기관현은 1837년(헌종 3)에 광주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1870년(고종 7) 식년시에서 갑과 2위[아원(亞元)]를 차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의하면, 1871년(고종 8) 양사(兩司)에서 올린 정기현(鄭岐鉉)과 정옥현(鄭玉鉉)의 가율(加律) 처벌 상소문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2년이 지난 1873년(고종 10)에는 기관현을 ‘전 지평(前持平)’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체직(遞職)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관현은 고종 10년에 최익현(崔益鉉)이 다소 과격한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심기를 건드려 유배를 간 사건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최익현을 두둔하다가 나중에는 도리어 죄에 몰아넣은 당시 부수찬(副修撰) 홍시형(洪時衡)의 파직을 요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기관현이 삭직(削職)되고 말았다.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 광주[광산] 편에서 “고종 10년에 정언으로서 상소하여 시사를 논하다 세가(勢家)와 뜻이 맞지 않아 귀향(歸鄕)하여 다시는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한 대목은 이를 두고 작성한 기록이다. 그 뒤로 기관현의 행적을 전하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을 계기로 관직 생활을 그만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