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3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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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衆美術運動 |
영어공식명칭 | Pop Art Movemen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은라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1980년대를 기점으로 일어난 미술인들 중심의 사회 변혁 운동.
[개설]
대중미술운동은 1980년대 기존의 심미주의적 미술이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일어난 미술계의 사회 변혁 운동이다. 1980년대 초반 미술 소집단이 전통 판화, 민화, 탱화, 무신도, 풍속화, 장승 등의 전통 미술을 걸개그림이나 벽화, 판화 등의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에서 비롯되었고, 5.18민주화운동 이후 대학 미술패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대중미술운동은 민족적·민중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현실 참여적 성격이 강해 민족미술운동, 민중미술운동, 대학미술운동 등과 혼용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80년 5.18민주화운동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를 현대사의 중심에 서게 하였다. 1979년 8월 결성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가 1980년 7월 남평 드들강변에서 개최한 진혼굿 형식의 야외미술전은 이후 광주미술이 나아갈 길에 대한 예시가 되었다. 미술인들은 미술을 통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남긴 상처와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고, 광주미술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사회 비판적·생활적·저항적 성격을 띤 보편적·대중적 미술 또는 시민 참여적 미술을 지향하게 되었다.
대중미술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중미술운동의 첫 번째 주체는 대학의 미술패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조선대학교 ‘토말’[1982년], ‘땅끝’[1982년], ‘개땅쇠’, ‘조선미술터’와 전남대학교 민화반 ‘불나비’[1986년], ‘마당’[1988년], ‘신바람’[1988년], ‘우리미술연구회’, 만화패 ‘창’ 등이 결성되었고, 호남대학교에서는 ‘매’[1987년], 광주교육대학교에서는 ‘솟터’[1988년]가 꾸려졌다. 각 대학의 미술패들은 우리 문화의 전통을 근간으로 한 민족 민중 미술 운동을 전개하였고, 미술 운동의 방식으로 목판화 운동, 걸개그림 제작, 대중을 대상으로 한 미술 교육 등을 선택하였다. 대학 내 미술패들은 1982년부터 민족 미중 미술 학습, 게릴라 선전물 제작, 대자보 작성, 피켓, 플래카드, 만화 등 시위에 필요한 각종 선전 홍보물을 제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83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대중 투쟁의 중요성이 한층 더 강조되었고, 사회운동과 합치된 미술 운동으로서의 실천 과정이 구체화되었다. 목판화 교육과 집회에서의 걸개그림 제작 등 대중과 함께 하는 ‘현장 미술’은 1980년대 광주가 지향한 사회적·실천적·대중적 미술을 성공적으로 반영하였다. 광주전남지역 대학미술패연합은 1980~1990년대 민주주의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 대학 중심으로 이루어진 미술 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자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세운 주도적인 세력으로 기록되었다.
대중미술운동이 교육 제도 내에서 발전한 또 다른 경우는 1983년부터 1992년까지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가 운영한 광주시민미술학교를 들 수 있다. 광주시민미술학교는 1980년 8월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로 활동하던 미술가·평론가들에 의하여 설립되었고,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지원 아래 현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있는 금남로 카톨릭회관에서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업의 주요 매체는 판화였고,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하루 3시간씩 1주일 동안 진행되었다.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의 선배 그룹에 속했던 홍성담, 최열 등이 전체 운영을 맡았고, 후배 그룹에 속했던 홍성민, 박광수 등이 실무 강사로 협조하였는데, “누구나 그리고, 깎고, 파고, 찍어서” 자신의 체험을 주고받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수강생은 평균 40여 명이었고, 공동체 답사와 토론 등의 활동을 더해 사회적 의식과 자기 표현, 창작의 가치를 실현해 나갔다.
1986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광주시민미술학교 수강생의 판화 작품 220점을 선별하여 『시민판화집』 「나누어진 빵」을 출간하였다. 『시민판화집』은 1980년대 전반 광주 시민의 정서를 투영하고 있으며, 노동과 일상을 통한 사회적 비판을 주제로 하였다. 『시민판화집』에 실린 ‘노동 수기’는 여성 금속 노동자의 생활을 담고 있는데, 열악한 처우와 비인간적 노동 강도에 스러져 가는 노동자를 추모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시민판화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판화를 매개체로 한 시민 교육은 민중, 대중, 시민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미술 문화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1988년 창립한 진보적 성향의 미술인 단체로, 1990년대 5월 미술의 운동을 주도한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가 운영한 겨울미술학교 역시 광주시민미술학교의 전철을 밟은 사례이다.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의 첫 미술 학교는 1993년 흥사단 광주지부 대강당에서 열렸고, 1998년까지 6년간 운영되었다. 겨울미술학교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가 지향하였던 미술의 시대적 역할에 대한 해답이었고, 교육을 통하여 미술인과 대중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2002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가 해체됨에 따라 겨울미술학교 역시 자연스럽게 중단되었지만, ‘학교’의 범주를 넓혀 시민에게 개방함으로써 보편성과 전문성을 종합한 대중미술교육을 실현한 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경과]
1988년 11월 조선대학교에서 전남대학교 미술패 ‘마당’과 ‘신바람’, 조선대학교 ‘개땅쇠’, 호남대학교 ‘매’, 광주교육대학교 ‘솟터’를 중심으로 광주·전남지역대학 미술패연합이 결성되었다. 이후 타 대학의 여러 미술패가 합류하여 같은 해 10월과 11월 광주시각매체연구소와 함께 벽보 선전전을 전개하였으며, 전국적 연대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미술 환경의 구조적 모순과 시대 상황에 맞서기 위하여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미술가를 선언하면서 대중과 사회현실의 소통을 강조하였던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는 1990년대 초까지 노동자와 농민을 대상으로 야학과 토론 학습을 지속하였고, 시민미술학교를 통하여 소수의 계층이 미술을 독점하는 폐쇄성을 극복하면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등 정치적 투쟁 현장에서 사회적·실천적 행동을 수행해 나갔다.
[결과]
1992년 이후 정세 변화에 따라 대학가의 학생미술운동이 침체되면서 대중미술운동도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92년 시민미술학교의 프로그램이 중단되었고, 1993년 문민정부의 출현과 민족미술연합회의 해체는 광주·전남 지역 대학미술패연합 활동에 영향을 주었고, 총학생회 문예동아리의 역량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중심 역할을 하였던 미술패들이 차례로 해체되었고, 남아 있던 미술패들 역시 완화된 형태의 미술패 운동 또는 답사, 세미나, 작품 품평 등으로 활동 영역을 전환하면서 2000년대 초·중반까지 지속되다가 흐지부지되었다.
[의의와 평가]
탐미주의적 예술관에 반기를 들고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민중미술운동과 달리 대중미술운동은 선전과 교육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대중미술운동가들은 민화와 판화, 걸개그림의 제작 등 학교 외 교육 체계를 통한 방법을 채택해 창작 과정에서의 공동체적 체험 등을 강조하였고, 현장 학습 중심의 미술 교육을 실현하였다. 홍성담·최열 등이 광주를 중심으로 '시민미술학교'와 '광주시각매체연구소'를 만들어 선전·선동으로서의 미술 활동을 개진한 예는 대중미술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