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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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공식명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을 비롯해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산·하양·자인에서는 많은 인사들이 창의(倡義)하여 왜군을 방어하고, 다른 고을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영천·성주·경주 수복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관군에 배속되거나 의병으로서 울산 도산성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은 건국 이후 사회 안정이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16세 중반 이후 왜구의 침입이 증가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모순이 배태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4대 사화와 훈구·사림 세력 간 정쟁으로 정상적인 정치 운영이 어려웠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일례로 조선 초기 경상도 군사 체제는 김해, 대구, 상주, 경주, 안동, 진주 등 6개의 진관을 두었다. 경산·하양은 밀양, 청도, 인동, 현풍, 의흥, 신령, 영산, 창녕과 함께 대구 진관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방군수포(放軍收布)와 대립(代立)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정부는 진관별 자전자수(自戰自守) 원칙을 포기하고 가용 병력을 총동원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방어 전략을 수정하였다.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과 조선을 포함하는 대륙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어 조선과 동맹을 체결하여 같이 명을 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일본의 제안을 거부한 조선은 이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경상도를 중심으로 성을 쌓는 등 대대적인 방어 정책을 펼쳤다. 그렇지만 축성(築城) 문제로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가면서 정치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그래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의를 탐지하고자 했다. 조선 정부는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이루어진 통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복명 당시 서인 계열의 황윤길은 일본이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럴만한 인물이라고 보고하였다. 반면 동인 계열인 김성일은 일본의 침공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럴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은 조선 정부는 비변사를 중심으로 축성, 군사 및 군비 정비 등의 조처를 서둘렀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부대를 3군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제1군은 4월 14일 동래를 거쳐 밀양·청도·대구·상주를 거쳐 조령을 넘는 중로(中路), 제2군은 경주·영천·안동을 거쳐 조령을 넘는 동로(東路), 제3군은 김해 죽도(竹島)로 상륙한 후 제4군과 합류하여 창원·함안·창녕·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는 서로(西路)로 진격하였다. 경산·하양·자인 지역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1군의 진격로에 위치해 있었다. 4월 14일에 동래성을 함락한 제1군은 동래·양산 등을 거쳐 4월 18일에는 밀양을 함락하고, 20일에는 청도를 점령하였다. 5월 2일에 한양까지 점령한 왜군들은 각 장수들로 하여금 도별로 점령지를 분할하여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에 경상도는 제7군(軍)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그 휘하 장수들이 점거하고 통치하였다. 특히 낙동강과 영남대로는 왜군들의 보급로로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왜군들은 이곳에 군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전란 초기 조선의 관군은 왜군의 침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실제 같은 해 5월 선전관(宣傳官) 민종신(閔宗信)의 보고에 따르면 전란 초기 접전이 벌어진 곳은 김해·상주·밀양·충주뿐이었으며, 당시 재직하던 수령 67인 가운데 25인 가량이 도망을 쳤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관에 대한 불신이 폭주하고 일부 백성들은 약탈과 보복을 일삼거나 스스로 왜인이 되어 반역을 저질렀다. 이러한 성향은 일찍이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간 경상도 지역에서 더욱 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경상도를 낙동강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전시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다. 왜군들은 경상우도를 교두보로 삼아 호남으로 진출하려고 노력했지만, 경상우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실현시킬 수 없었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과 창녕·합천·고령 등지에서 활약한 곽재우·정인홍·김면 등이 활약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영남대로 상에 위치한 밀양·대구·청도·선산 등지는 왜군의 점령 아래 있었고, 그런 이유로 대구 인근의 경산·하양·자인 등지도 피해가 적지 않았다.
전란 초기 관권의 부재를 대신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백성과 흩어진 관병을 모아 적들과 맞선 자들은 바로 지역의 뜻 있는 재지 사족들이었다. 재지 사족들은 지역에서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학문적 관계를 매개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절의(節義)’ 정신의 실천과 향촌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전란 초기 경산·하양·자인 세 고을의 의병들은 인근 고을에 주둔 중이던 왜군들의 침입을 방어하거나, 다른 지역의 의병장과 합세하여 영천·성주·경주 수복 전투에 투입되었다.
최응담(崔應淡)[최대기(崔大期)]의 『회당실기(晦堂實紀)』에 따르면 경산현에서는 이미 5월에 경산현령이 고을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관군을 대신하여 뜻있는 인사들이 일찍부터 의병을 일으켰다. 경산 지역은 정경세(鄭經世)가 “경산은 아주 작은 고을이지만, 가장 먼저 창의하였다[慶山如斗小邑 首先倡義]”고 말한바 있듯이 여타 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빨리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변함·정변호·정변문이 창의하자 최응담·박응성·진섬·진엽·남중옥·전락·승적 등이 합류하였으며, 이들은 최응담을 경산의 의병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어 왜군들이 침입해 올 수 있는 대구 또는 청도 방향의 요해지를 분담해서 방어하였다. 왜군들은 남쪽의 성현(省峴)을 통해 경산으로 들어왔는데, 경산 의병들은 매복을 통해 왜군을 물리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지금의 남천면 금곡리 일대에 출몰한 왜적들을 물리치고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현재 대구에 편입된 욱수동 망월산성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그 외에도 자인 방면에서 쳐들어온 왜군들을 남천면 삼성리 연화봉(蓮花峯) 아래에서 물리쳤다.
하양현에서는 일명 ‘하양현 창의 8의사’라 불리는 신해·김거·허대윤·허경윤·박능정·박붕·허응길·황경림의 활동이 주목된다. 실제 4월 말 왜군 100여 명이 와촌(瓦村) 일대로 침입해 왔으며, 이에 신해 등의 하양 의병들이 이들을 물리치고 무기를 빼앗았다고 한다. 5월 무렵에는 신해가 영천·신녕에서 의병을 일으킨 권응수(權應銖)의 부대에 합류하자, 황경림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하양현 지역을 방어하였다.
자인현은 이 무렵 경주부의 속현(屬縣)이었다. 자인현의 의병들은 의병장 최문병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최문병은 4월 중순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처음 들은 후 5월초에 통문(通文)을 내어 창의할 인사와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당시 의병장으로 추대된 최문병은 휘하의 유인춘·박영성·권삼로·이상·윤기·김우용·이춘암·박몽량(朴夢亮)·김우련·최동립·이기억·이춘함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5월 11일에는 오목천에 출몰한 왜군들을 물리쳤으며, 인접한 청도의 박경전 부대와 함께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 외에도 자인현 출신의 최팔개(崔八凱)·최팔원(崔八元) 형제는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동래성으로 달려가 왜군들과 싸웠으며 이 전투에서 최팔원이 순절하였다. 또한 경산의 장이원(蔣以愿)과 장몽기(張夢己), 자인의 윤동호(尹東豪) 등은 대구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같은 자인 출신의 이승증(李承曾)은 대구 사림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의병의 활동은 빠르게 북상하고 있던 왜군들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시켰으며, 전란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안집시켰다. 정부에서도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전란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1차적으로 지역 방어에 치중했던 의병들은 관군 또는 각 의병진끼리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6월에는 경산을 지켰던 박응성과 정변함·정변호·정병문 등이 조령(朝令)에 따라 경상우도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성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낙동강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성주의 사원(蛇院) 전투에서 박응성과 세 아들 박근(朴瑾)·박장(朴璋)·박헌(朴瓛)이 순절하였다. 그 후 정변함 등은 의령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곽재우(郭再祐)의 부대에 합류하였다. 경산·하양·자인 지역 의병들이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영천성 수복 전투이다. 영천의 의병장 권응수(權應銖)는 영천성 수복을 준비하면서, 인근 고을의 의병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하양의 의병장 신해는 연합부대의 좌군 총제(總制)를 맡았으며, 자인의 의병장 최문병은 우군 총제를 맡았다. 경산의 최응담·진섬 등도 권응수 부대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7월 23일 영천성을 공략해 수복하였다. 이때 경산 출신의 진섬은 전투를 앞두고 적진을 정탐하다 순절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후 관군과 의병들은 경주성 탈환을 시도하게 된다. 이에 앞서 6월에 경주와 인근 고을의 의병들은 경주 문천(汶川)에서 회맹(會盟)하여 경주성 탈환에 대한 의지를 다졌는데, 이때 자인에서는 최문병의 지시로 김우련·김우용과 최문병의 아들 최희지·최경지가 파견되었으며, 경산현 출신의 어운한 등도 참여하였다. 이어 8월에 전개된 경주성 전투에서는 박연경(朴延慶)·전억주(田億疇) 등이 활약하였다.
1593년(선조 26)부터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조정에서는 의병을 통제하기 위해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에 따라 향병적(鄕兵的) 성격의 기존 의병 조직도 근왕병적(勤王兵的) 성격의 준관군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의병 활동의 전개 양상도 변하게 된다. 1593년 2월 함창(咸昌)에서 있었던 ‘당교(唐橋) 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연합하여 펼친 전투이다. 이 전투와 관련해 당교에서는 여러 고을에서 온 의병들이 회맹을 했는데, 이때 경산 출신으로는 남중옥·최덕기(崔德基), 자인 출신으로는 김진이 참여하였으며, 경산 출신의 장몽기는 실제 벌어진 당교전투에서 순절하였다. 1597년(선조 30) 연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울산의 왜성인 도산성(島山城)에서는 조·명 연합군이 전개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경산에서는 박연경, 하양에서는 박능정·박붕(朴鵬), 자인에서는 박응득(朴應得)·박응량이 참전하였으며, 박능정은 전투 중 순절하였다. 한편, 김붕(金鵬)과 최철견(崔鐵堅)은 관군을 지휘하는 권율(權慄) 휘하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하였다.
[결과]
1598년 11월 노량해전(露梁海戰)을 끝으로 7년간의 전란은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은 왜군의 진격로에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지만, 왜군에 맞서 많은 의병이 일어난 지역이었다. 경산 지역도 피해가 컸지만, 그만큼 여러 의병들이 창의하여 고장을 지켰다. 이에 경산 출신 인사로는 신해·최동립·최식·장몽기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 김응룡·박연경·박응량·이억수·이창후·전복명·최결·최인수·최항·허경윤·허대윤·허응길이 선무원종공신 3등에 각각 녹훈되었다.
[의의와 평가]
경산·하양·자인의 의병장 대부분은 세거(世居)하며 재지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던 사족이었지만, 이주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전직 관인들도 있었다. 이들의 의병 활동은 전란 이후 재지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이들은 전황의 추이에 따라 능동적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고립·분산되어 전개한 것이 아니라, 유력한 의병장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전장의 범위도 확대되어갔다. 그 중에서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자인현 출신 인사들의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훗날 자인현의 복현(復縣) 운동을 전개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