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682
한자 崔應淡
영어공식명칭 Choe Eungdam
이칭/별칭 군응(君應),회당(悔堂),최대기(崔大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4년연표보기 - 최응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최응담 임진왜란 창의
몰년 시기/일시 1593년 2월 3일연표보기 - 최응담 사망
출생지 최응담 출생지 -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
활동지 최응담 활동지 - 경상북도 경산시
활동지 최응담 활동지 - 경상북도 영천시
묘소 최응담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부동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훈련원 부정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최응담(崔應淡)[1564~1593]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고향인 경산현(慶山縣)을 방어하였으며, 영천성(永川城) 수복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가계]

최응담의 본관은 흥해(興海), 초명은 대기(大期), 자는 군응(君應), 호는 회당(悔堂)이다. 시조는 고려 검교장군을 지낸 최호(崔湖)로 군공을 세워 곡강군(曲江君)에 봉해졌다. 증조할아버지 최건동(崔健潼)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원래 밀양에 살다가 경산현 북면 반계리(磻溪里)[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로 이거하였다. 할아버지는 최상(崔祥)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최해(崔海)는 전적을 지냈다. 어머니는 부장 권상준(權尙俊)의 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부인은 훈련원 정 류상준(柳尙俊)의 딸 문화 류씨(文化柳氏)이고, 최인흡(崔仁洽)·최의흡(崔義洽)·최신흡(崔信洽)·최도흡(崔道洽)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최인흡은 훈련원 주부로서 이괄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원종공신에 올랐으며, 최의흡은 훈련원 판관, 최신흡은 부산첨사, 최도흡은 사복시 주부를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최응담은 1564년(명종 19) 경산현 북면 반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대장이라 부르며 아이들을 지휘하기를 좋아하였다. 성장해서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다양한 학문을 널리 배웠는데, 특히 무예에 뛰어났다. 1585년(선조 18) 연이어 부모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서 상례(喪禮)를 치렀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의병을 일으키자 수백 명이 모였다. 당시 정변함(鄭變咸)·정변호(鄭變頀)·정변문(鄭變文)·진섬(陳暹)·진엽(陳曄)·승적(承迪)·박응성(朴應成) 등이 합세하여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진섬·진엽·남중옥(南仲鈺) 등과 함께 성현(省峴)에서 왜적들을 물리쳤으며, 수급 30급과 군마 14필 등을 노획하였다. 또한 금곡(金谷)[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금곡리]의 왜적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이때 노획한 식량과 무기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어 자인현(慈仁縣)에 쳐들어온 왜적을 남천면 삼성리 연화봉(蓮花峯) 아래에서 섬멸하였다. 1592년 6월 말 하양 의병장 신해(申海)와 함께 영천의 좌도 의병대장 권응수(權應銖) 휘하에 들어가 영천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경산·자인·하양의 의병들은 최문병(崔文炳)이 우군 총수로서 지휘하였는데 최응담은 여러 의병장들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왜적을 선제공격하여 수십 급을 베었다. 이때 동남풍이 불자 화공을 사용하여 왜적이 감히 성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최응담은 화살 세 발을 맞았지만 분전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영천성 전투의 승리로 인해 훈련원 부정에 임명되었다. 1592년 8월에 삼려(三閭)의 왜적을 공격하여 적장 평의훈(平義訓)을 베는 등 왜적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1592년 겨울에 병이 심화되어 1593년(선조 26) 2월 3일에 사망하였다.

[묘소]

최응담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부동 부제(釜提)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응담은 영천성 수복 전투의 공으로 훈련원 부정에 제수되었다.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1848~1934]이 묘지명(墓誌銘), 경산현령을 지낸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1795~1875]가 유허비명(遺墟碑銘)을 각각 지었다. 유허비는 당시 최응담의 생가 앞에 세웠는데, 그 자리에 반야월역 청사가 건립되면서 일본인들이 땅에 묻어 버렸다. 광복 후 유허비와 비각을 대구광역시 동구 율하동 저탄장 옆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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