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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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八元 |
영어공식명칭 | Choi Palwon |
이칭/별칭 | 군거(君擧),죽포(竹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최팔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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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5년 - 최팔원 문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최팔원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7년 - 최팔원 유허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69년 - 『죽은죽포이공실기』 편찬 |
추모 시기/일시 | 1987년 - 최팔원 용산서원 배향 |
출생지 | 최팔원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
활동지 | 최팔원 활동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
묘소 | 최팔원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쟁서봉사(典牲署奉事)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의병.
[개설]
최팔원(崔八元)[1562~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팔개(崔八凱)와 함께 송상현(宋象賢)을 구원하기 위해 동래성(東萊城)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부산진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가계]
최팔원의 본관은 흥해(興海)[곡강(曲江)], 자는 군거(君擧), 호는 죽포(竹圃)이다. 고조할아버지 최지형(崔沚瑩)은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고 처가인 밀양으로 이거하여 살았다. 고조할머니는 밀양 손씨이다. 증조할아버지 최순동(崔順潼)은 둘째 아들로서 진사시에 입격하고, 후에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였다. 증조할머니는 군수 김경(金警)의 딸 청도 김씨(淸道金氏)로서 김지대(金之岱)의 후손이다. 최순동은 밀양에서 자인현 곡란리(谷蘭里)로 이거하였다. 할아버지는 난실(蘭室) 최운수(崔雲水)로 훈도로 천거되었다가 사마시에 입격한 후 산림에 은거하였다. 친아버지는 난고(蘭皐) 최응해(崔應海)로 효행과 학문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제수 받았다. 친어머니는 정랑 조박(趙鎛)의 딸 한양 조씨(漢陽趙氏)이다. 최팔원은 숙부 난계(蘭溪) 최응하(崔應河)에게로 출계(出系)하였다. 부인은 참봉 김응정(金應挺)의 딸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며, 둘째 부인은 정현(鄭玹)의 딸 영일 정씨(迎日鄭氏)이다. 친형은 최팔개(崔八凱)이다.
[활동 사항]
최팔원은 1585년(선조 18)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 무공랑(武功郞) 박사(博士), 전생서 봉사(典牲署奉事)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각 고을에 글을 보내어 참전을 독려하였다. 평소 송상현을 알고 지내던 최팔원은 그의 형 최팔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가동(家童)과 마을의 장정 28명을 모아 동래로 구원을 갔다. 범어(梵魚) 고개에 이르러 동래 부사 송상현이 순절하고, 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들 형제는 왜적이 있음에도 송상현의 충의를 조문하기 위하여 동래성의 남문으로 달려가 제사를 지냈다. 이를 보고 쫓아 온 왜적과 부산진에서 맞서 싸웠는데, 형 최팔개가 부상을 입어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날이 저물고 왜군이 수없이 모이자, 최팔원은 홀로 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69년 후손들이 최팔개·최팔원 형제의 행적을 엮은 『죽은죽포이공실기(竹隱竹圃二公實紀)』를 간행하였다.
[묘소]
최팔원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의 사량곡(思良谷) 용산(龍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3년(광무 7) 도론(道論)으로 재실을 세우고 최팔개·최팔원 형제의 위패를 봉안하여 ‘사절각(思節閣)’이라고 이름했다. 편액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지었다. 1918년에 사우(祠宇)를 중건(重建)하였으며, 1964년에 강당(講堂)을 증축하고 편액을 ‘경의사(景義祠)’라 이름 지었다. 1987년 유림에서 결의하여 용산서원(龍山書院)[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1길 19-16]으로 승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