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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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命乭 |
영어공식명칭 | Kim Myeongdol |
이칭/별칭 | 김성명돌(金城命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16년 11월 21일 - 김명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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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4년 7월~8월 - 김명돌 대왕산 죽창의거 참여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김명돌 대통령 표창 |
몰년 시기/일시 | 1983년 11월 30일 - 김명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김명돌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5월 31일 -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 건립 |
출생지 | 김명돌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22 |
거주|이주지 | 김명돌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22 |
학교|수학지 | 김명돌 학교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
활동지 | 김명돌 활동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
묘소 | 김명돌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송내리 산69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결심대 부대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명돌(金命乭)[1916~1983]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대항하여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 죽창의거(大王山竹槍義擧) 때 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김명돌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일제의 창씨개명으로 김성명돌(金城命乭)로 이름을 고치기도 했다. 1916년 11월 21일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사월리 2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한호(金漢浩), 어머니는 오정분(吳丁粉)이다. 김명돌은 의거 이전까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김명돌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김명돌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 때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하고 편제를 정했는데, 대장은 안창률(安昌律), 부대장은 김명돌이 맡았다. 김명돌이 부대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남산공립보통학교 1기 졸업생으로 일본어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방단(警防團)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김명돌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명돌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김명돌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묘소]
김명돌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송내리 산690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명돌은 1980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95년 5월 31일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에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抗日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를 건립하여 일제에 항거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