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417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항일운동,민족해방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895년부터 1945년까지 경상북도 경산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

[개설]

경산 지역의 독립운동은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된 의병항쟁애국계몽운동, 1910년대의 독립운동과 3·1운동, 1920년대 국내외의 독립운동과 대중운동, 그리고 1930년대 이후 1945년까지 전개된 국내외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대한제국기의 국권 회복 운동]

대한제국기 의병 전쟁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 그리고 11월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일어났다.

1896년 전기의병의 활동은 경산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1906년 3월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할 때, 경산 지역에서도 자인 출신의 김세순과 하양 출신의 이봉조가 참여하였다. 1907년 이후 정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이에 1908년 경산군 남천면 신석동[지금의 경산시 남천면 신석리] 출신의 의병장 권병호(權炳瑚)가 경산·청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5년 이후 애국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경상북도에서는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지회가 설립되거나, 독자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경산 지역에서는 대한협회 자인지회가 조직되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신교육운동과 산업 진흥 운동을 전개 하였다. 특히 신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1906년 10월 자인군의 포명학교(布明學校) 설립을 시작으로 1909년 9월 자인군의 덕숭학교(德崇學校)까지 10여 개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1907년 4월에는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가 조직되어, 「경산군국채보상단연동맹회취지서」를 발표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

1910년대 국내의 민족운동은 비밀결사 활동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비밀결사 활동이 비교적 왕성했던 곳이 경상도 지방이었다. 경상도에서는 의병전쟁계열의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민단조합(民團組合)과 애국계몽운동 계열의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이 시기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였다.

경산 지역에서는 일우(一友) 허병률(許秉律)광복회(光復會), 서성용(徐聖鎔)이 1910년대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서 각각 활동하였다.

[3·1운동]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에 경산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계획되었지만,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경산 출신의 애국 지사들이 다른 지역의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표적으로 대구 계성학교 교감이었던 경산군 용성 출신의 백남채(白南採)와 동생 백남규(白南圭)는 대구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었다.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 목사 김기원(金基源)은 경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외 경산 출신 김무생(金武生)최경학(崔敬學)은 대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김성욱(金聲旭)은 영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과 대중운동]

1920년대 경산 지역에서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독립운동단체는 없었지만, 이들과 연계한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독립군 모집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에서 이를 주도했던 인물로는 허병률(許秉律)·김성로(金聖魯)·서동일(徐東日) 등이 있다.

한편, 청년운동·형평운동·소년운동·신간회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경산 지역의 대표적인 청년운동 단체로는 1920년 11월 16일 창립된 경산기독청년회(慶山基督靑年會), 1921년 창립된 자인청년구락부(慈仁靑年俱樂部), 1921년 10월 창립된 경산청년회(慶山靑年會), 1922년 창립된 자인청년회(慈仁靑年會), 1926년 창립된 안심청년회(安心靑年會), 1927년 창립된 하양청년회(河陽靑年會)와 여성청년단체인 하양여자친목회(河陽女子親睦會)이 있다. 그런 가운데 1926년경부터는 경산청년회를 사회주의 청년운동 단체로 전환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7년 6월 이후에는 조선청년총동맹의 방향 전환에 발맞춰 경산 지역의 청년운동 단체들도 단일 청년동맹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그 결과 경산청년동맹(慶山靑年同盟)이 조직되었다.

[1930년 이후의 독립운동]

1930년대 이후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전시체제를 선포하였다. 이에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인적·물적·정신적 수탈을 감행하게 된다.

경산 지역에서도 각 면별로 징병검사를 실시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청년훈련소(靑年訓鍊所)를 설치하였다. 그 외에도 무학적령자를 대상으로 한 특별청년연성소(特別靑年鍊成所)와 무학 미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자특별청년연성소(女子特別靑年鍊成所)를 설치하여 인력의 수탈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전시체제 하에서 경산 지역에서는 주로 군자금 모집이나 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파괴 및 지하거점 확보를 목적으로 한 개별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으로 1940년 12월 하양 출신 현영만(玄泳晩)무우원사건, 1943년 3월 박만선(朴晩善)의 비밀결사 사건, 1944년 하양 출신 최인환(崔仁煥)의 항일 투쟁 등이 있다. 1944년 7월에는 징용에 반대한 경산 지역 청장년들이 소위 대왕산죽창의거(大旺山竹槍義擧)를 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대구 제24부대 학병탈출의거 등이 일어났는데, 경산 지역 인사들도 적지 않게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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