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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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在達 |
영어공식명칭 | Park Jaedal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17년 8월 15일 - 박재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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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4년 7월 26일~8월 13일 - 박재달 대왕산 죽창의거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63년 2월 19일 - 박재달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박재달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박재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5월 31일 -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 건립 |
출생지 | 박재달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38 |
거주|이주지 | 박재달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38 |
활동지 | 박재달 활동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
묘소 | 박재달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결심대 정보연락대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재달(朴在達)[1917~1963]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대항하여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 죽창의거(大王山竹槍義擧)를 주도하였다.
[가계]
박재달은 1917년 8월 15일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사월리 138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박만조(朴晩祚), 어머니는 손문순(孫文順)이다. 박재달은 의거 이전까지 농업에 종사하였다. 박재달의 형은 당시 북해도(北海島)에 강제 연행된 상황이었고, 동생 박재천(朴在千)은 자인공립보통학교(慈仁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남산면 농업지도원(農業指導員)을 거쳐 1942년부터 남산면 서기(書記)로 근무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박재달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박재달은 징병·징용 훈련을 받고 있던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방안을 주도적으로 논의하였다. 우선 박재달은 사월리 청년들에게 “일제에 충성하여 징용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어차피 죽을 목숨 일제에 항거하다 죽자!”고 제의하였다. 동생 박재천과 같은 마을의 김인봉(金仁鳳)이 각각 남산면 서기(書記)와 기수(技手)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재달은 당시 정세 변화와 일제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이러한 제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재달은 1944년 7월 5일부터 15일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친 회합을 통해 탈출계획을 세우고 동지규합에 나섰다. 1차 회합은 7월 5일 마을 참외밭 원두막에서 열렸는데, 동지 규합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 회합에는 남산면 사월리 청년 박재천·김인봉·성상룡(成相龍)·최동식(崔東植) 등이 참여하였다. 7월 8일 열린 2차 회합에는 사월리 청년들을 비롯하여 산양리(山陽里)의 김임방(金任方), 송내리(松內里)의 김위도(金渭道), 남곡리(南谷里)의 최외문(崔外文) 등이 참여하여, 각 마을 대표로 정하고 동지를 포섭하기로 했다. 그리고 7월 15일 밤 9시경 자인면 원당보에서 3차 회합이 열렸다. 각 마을에서 모인 청년 29명이 함께 주요 안건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가 투쟁하기로 하고, 박재달은 박재천·김인봉 등과 함께 마을에 남아 정보 연락을 맡기로 하였다.
7월 26일 새벽 4시 30분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의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다. 대왕산의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한 뒤 일경에 항거하였다. 결심대는 세 차례에 걸쳐 일경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주재소를 공격해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나아가 식량 공급과 진지 이동에 대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러나 대왕산의 결심대원들은 식량공급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8월 9일 하산하여 각기 마을에 은신하였다. 이 투쟁 기간 중 박재달은 정보연락대장으로 이들을 후원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 다른 결심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박재달은 결심대 대원들과 함께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받았다. 1945년 4월 병보석으로 출소하였고, 해방을 맞이해 8월 17일 소송이 취하되었다. 해방 후 면의원(面議員)을 지냈다.
[묘소]
박재달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재달은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95년 5월 31일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에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抗日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를 건립하여 일제에 항거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