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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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東日 |
영어공식명칭 | Seo Dongil |
이칭/별칭 | 서천구(徐天球),서춘파(徐春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영범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서동일(徐東日)[1893~1965]은 1923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국민당(國民黨)과 다물단(多勿團)에 가입하였다. 국내로 들어와서는 경산·청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서동일의 호는 춘파(春波)이다. 1893년 12월 25일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서부리 23에서 출생하였다. 피검 당시 자료에는 본적이 대구부(大邱府) 대구면(大邱面) 남용강정(南龍岡町)[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명으로 서천구(徐天球)·서춘파(徐春坡)를 사용하였다. 부인은 최옥경이다.
[활동 사항]
서동일은 1923년 음력 1월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남지자(南池子) 북구로(北口路) 동쪽에 이발소를 차렸다. 같은 해 7월 경상북도 고령(高靈) 출신의 전 임시정부 교통총장 남형우(南亨祐)와 대구 출신 배천택(裵天澤)의 종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국민당은 1923년 3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 중이던 대구·경북 출신 인사들이 창립하였는데, 만주 지역에서 실력을 기른 후 항일무장투쟁을 목표로 삼았다.
1924년 1월 국민당 이사장 남형우와 서무부장 겸 외교부장 배천택이 서동일에게 신임장과 모금취지서를 주면서 국내로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해올 것을 지시하였다. 즉시 입국한 서동일은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 도리동[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도리리]의 지인 이종호(李鍾昊)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여 같은 마을의 박경칠(朴景七)과 박지영(朴志榮)에게 45원을 기부받았고, 경산군 자인면 북사동[현재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의 석제원(石濟元)과 남산면 경동리의 김상규(金相珪)에게서도 110원을 기부받았다. 이어 청도군 운문면 공암동으로 가서 외칠촌인 전 군수 윤영섭(尹瑛燮)의 영향력을 빌려 이심동(李心同)에게 1,000원, 윤병권(尹炳權) 외 2인으로부터 115원, 청도군 금천면의 박순병(朴淳炳)에게 35원을 모금하였다. 그런 뒤 베이징으로 돌아가 여비 제외 1,100원을 남형우와 배천택에게 전달하였다. 1925년 1월에도 서동일은 남형우의 명을 받고 재차 밀입국하여 이심동에게 다액 출금자 표창기장(表彰記章)을 전달하고, 김상규로부터 5월 이내로 500원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다. 베이징으로 귀환한 그는 동성(東城) 왕지마호동(汪芝麻胡同) 14호에 머물렀다.
그러나 국민당의 활동이 지지부진해지자 배천택·한진산(韓震山) 등이 서왈보(徐曰甫)·김세준(金世晙) 등의 협력을 얻어, 1925년 4월 4일 다물단을 발족시켰다. 다물단은 악분자(惡分子), 즉 배족자 및 밀정 소탕을 주된 행동방침으로 삼는 비밀조직이었다. 서동일은 4월 14일 다물단에도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을 떠맡았다. 배천택의 명을 받고 5월 11일에 베이징을 떠난 그는 5월 28일 경산군 자인면[지금의 경산시 자인면]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장재수(張在洙)·석제원·김윤근(金潤根)으로부터 합계 120원을 후일 받기로 약정하고, 남산면 김상규의 차남 김두남(金斗南)에게서 여비조로 10원을 받았다. 군자금 거둘 곳을 더 물색하던 중인 6월 초순 그는 경산경찰서 자인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예심을 거쳐 치안유지법과 제령 제7호 위반 죄목으로 기소된 서동일은 1926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180일 통산] 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서동일은 1929년 6월 중앙청년동맹의 체육부장으로 선임되었고,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창당발기인이 되어 인민공화국 배격과 임시정부 봉대(奉戴) 선언에 동참하였다.
[묘소]
서동일은 망우역사문화공원[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서동일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