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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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東植 |
영어공식명칭 | Choi Dongsik |
이칭/별칭 | 영산동식(永山東植)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26년 1월 27일 - 최동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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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4년 7월~8월 - 최동식 대왕산 죽창의거 참여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최동식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동식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5월 31일 -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 건립 |
몰년 시기/일시 | 2005년 4월 29일 - 최동식 사망 |
출생지 | 최동식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62 |
거주|이주지 | 최동식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62 |
활동지 | 최동식 활동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
묘소 | 최동식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동 산 27-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결심대 헌병대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동식(崔東植)[1926~2005]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대항하여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 죽창의거(大王山竹槍義擧) 때 헌병대원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최동식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일제의 창씨개명으로 영산동식(永山東植)로 이름을 고치기도 했다. 1926년 1월 27일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사월리 162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상곤(崔尙坤), 어머니는 김이분(金以分)이다. 최동식은 의거 직전까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활동 사항]
최동식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최동식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 때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했는데, 최동식은 헌병대원으로 편제되었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최동식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동식과 결심대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최동식은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묘소]
최동식의 묘소는 국립신암선열공원[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에 있다.
[상훈과 추모]
최동식은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95년 5월 31일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에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抗日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를 건립하여 일제에 항거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