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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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始發點, 唐城 |
영어공식명칭 | The starting point of the Silk Road, Dang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황보경 |
[정의]
화성 당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대 신라와 중국 간의 인적·물적 교류.
[중국과의 통로, 남양만]
경기도 서남부에 자리한 화성 지역은 고대부터 남양만을 통해 중국 산둥반도의 등주(登州)나 청도(靑島) 등으로 오갈 수 있는 서해의 관문이었다. 남양만에서 산둥반도로 건너가는 항구는 화량진과 마산포가 대표적이었으며, 연안 항로와 서해 직단 항로가 모두 이용되었다.
한편,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있는 '화성 당성'은 남양만을 통제하고, 수원과 용인, 이천 지역으로 통하는 육상 교통로를 함께 관할하던 거점 성이었다. 특히 남양만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해안을 오가는 배들을 감시하기에 유리하였다. 지금은 서해안 간척 사업으로 당성 앞이 많이 육지화되었지만, 고대에는 해안선이 훨씬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당성 주위로는 백곡리 산성을 비롯하여 백곡리 절터, 백곡리 고분군, 백곡리 유적, 상안리 유적Ⅰ·Ⅱ, 상안리 유물 산포지 등이 있다. 또 반경 3㎞ 내외에는 서북쪽에 화량진성, 남쪽에 청명산성, 북동쪽에 사강이 있으며, 북서쪽 6㎞ 거리에는 마산포가 있다.
[신라, 당성을 품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다.]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 있던 신라는 6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고구려·백제의 도움 없이 중국과 직접 외교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과 직접 외교 교섭을 갖기 위해 신라에게 가장 필요하였던 것은 중국으로 통하는 항구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통해 551년(진흥왕 12)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고, 553년(진흥왕 14)에는 백제가 차지하였던 한강 하류 유역까지 빼앗고 당성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제 신라는 남양만을 통해 중국에 직접 사신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는 6세기 중후반부터 적극적인 대중국 외교를 진행하였고, 북제와 진, 수·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을 견제한 고구려와 백제가 642년 혹은 643년에 당성을 함락하기 위해 공격하여 오기도 하였다. 이때 신라는 당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신라는 이후로도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청병사를 파견하였으며, 결국 나·당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청병사로 파견되어 나·당동맹 결성에 공을 세운 주요 인물로는 김춘추를 비롯하여, 김춘추의 아들인 김인문, 김문왕 등이 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출발한 당 수군이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당시 당성과 덕적도는 나·당 수군이 주둔한 해군 기지였다. 이후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백제 멸망 후에는 고구려가 멸망하였고, 이어 다시 나당전쟁이 벌어졌다. 신라와 당이 동맹 관계에서 적국이 된 것이다. 양국은 육지와 바다에서 676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최종적으로 신라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이 완수되는 순간이었다.
[신라의 출입국 사무소 당성, 김춘추 출입국 심사를 받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국을 나가는 방법을 물어보면 대부분 공항을 가서 비행기를 탄다고 대답할 것이다. 신라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 당성에 가서 배를 탄다고 하지 않을까? 남양만에 접해 있는 당성은 중국으로 입출항하는 사람과 문물을 통제하던 거점 성으로, 지금의 출입국사무소나 다름없었다. 당성 인근의 항구는 덕적도를 거쳐 중국과의 직접 교류가 가능하였을 뿐 아니라, 황해도 개성 지역과 충청도 및 전라도로도 갈 수 있는 거점 항구였다.
당성 주변에서는 백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도 출토되고 있는데, 삼국 시대 초기부터 서해안의 여러 지역과 해상 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중국과의 교류 창구 역할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성에서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당성을 경영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신라에게 있어서 당성은 중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국제 항구였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의 당성에 가면 김춘추를 포함한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당나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전에 배표를 들고 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7세기부터 9세기까지 당의 국자감으로 유학을 떠난 인원이 상당히 많았는데, 희강왕 대에는 유학 중인 인물이 216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661년에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당성에 왔다가 의상만 출국한 일화도 유명하다. 『계원필경집』과 「시무십조」로 유명한 최치원도 당성을 통해 867년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왕래하는 사람과 물품의 수가 증가하게 되자 당성도 2차 축성을 통해 규모를 확장하였다. 또, 당성 주위에 백사와 같은 사찰이 창건되었고, 물품의 관리와 보관을 위한 건물도 건립되어 항구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사람과 문화가 오간 당성, 외국인을 구경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외국인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굳이 우리와 다른 외국인을 보러 공항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이전만 해도 길에서 외국인을 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고대에는 이들의 존재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다수였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신라의 어린이들이 자신들과 다른 언어를 쓰는 외국인을 보기 위해 당성으로 놀러 가지 않았을까?
당성은 국제적인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지던 허브 항구이자, 신라와 중국의 문화가 서로 교류하던 장소였다. 중국에서 사신단이 신라를 방문할 때에는 상인과 승려 등도 함께 동행하였기 때문에, 정치·경제·종교·문화 등 모든 분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565년, 진나라에 가서 유학한 승려 명관(明觀)이 사신 유사(劉思)와 함께 신라에 귀국하였는데, 불교 경론(經論) 1,700권을 가지고 왔다. 636년에는 자장이 제자들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머물다가 643년 대장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또 674년에는 당나라에 숙위로 파견되었던 덕복(德福)이 새로운 역법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와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다양한 문물을 주고받았는데, 신라에서는 주로 금·은 등의 귀금속류와 각종 약재, 견직물을 보냈다. 당에서도 금포와 금대, 각종 견직물을 보내왔다. 뿐만 아니라, 당성에서 중국 월주요와 형요에서 생산된 청자와 백자, 정요에서 생산된 송나라 대 백자도 출토되어 중국 도자가 상당량 수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성을 통한 사람과 문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신라의 이름은 당을 넘어 서역 세계에까지 알려졌으며, 당성을 통해 수입된 새로운 문물은 일본에도 전하여졌다.
한편, 영흥도 서쪽 3㎞ 정도 떨어진 섬업벌에서 8~9세기에 제작된 ‘영흥도선’이 발굴되어 주목된다. 잔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안압지선’과 구조가 비슷하다. 선체는 소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선체에서 철제 솥을 비롯한 도기 병, 골각류 등이 출토되었다. 영흥도선 발굴을 통해 연안 항로를 따라 사람과 물품을 실어 나르던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당성을 품은 화성의 미래]
당성은 삼국 시대 이래 육상 교통로와 해상 교통로가 만나는 교통의 결절지였다. 특히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는 중국을 왕래하기 위한 국제 항구였고, 입국한 사신이나 상인, 승려들은 왕경인 경주와 한산주 경내의 시장, 사찰로 가기 위해 육상 교통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특히 신라에는 왕경에서 전국으로 연결되는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었는데, 당성으로 통하는 길은 ‘염지통’이었다. 염지통은 서해안에서 생산된 양질의 소금과 토산품을 유통하였던 교통로인데, 사신과 상인 등도 왕래하였다.
현대에도 당성 주변에 송산그린시티, 국제테마파크, 해양복합산업단지 등의 개발이 추진 중이거나 계획되고 있어서 새로운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또한 세계에서 처음 발견된 새로운 종류의 공룡알 화석이 송산면 고정리에서 발굴되어 주목받고 있다. 화성시에서는 곧바로 방문자 센터를 설치하였고,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또한 국립자연사박물관 유치를 위한 활동도 전개되고 있다. 아울러 전곡항에 테마 어항이 조성되어 요트와 보트가 밀물과 썰물에 관계없이 항시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뱃놀이 축제도 개최되고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대기업 생산 시설도 건설됨에 따라 최근 화성 지역으로 유입되는 인구도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당성이 위치한 남양만 일대가 개발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전곡항과 궁평항 그리고 제부도 등의 섬을 찾는 관광객 수도 증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성도 지속적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학술적 성과를 내고 있으며, 성벽도 복원되고 있어서 해안이나 내륙에서도 위풍당당한 성벽의 자태를 조망할 수 있다. 이에 화성을 찾는 관광객들이 당성에서 서해안의 경치를 즐기고 있으며, 축제와 교육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도 당성과 주변 지역에 대한 학술 조사가 진행되고 개발 사업도 진척된다면, 문화재와 최첨단 도시가 조화를 이루는 국제적인 항구 도시의 면모가 재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