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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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西洋畵壇-巨木-吳之湖畵伯 |
이칭/별칭 | 모후산인(母后山人)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1길 48[독상리 277-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지용 |
출생지 | 오지호 생가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1길 48[독상리 2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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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활동지 | 오지호 - 광주광역시 동구 필문대로 309[서석동 375] |
[오지호 그는 누구인가?]
오지호(吳之湖)[1905~1982]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출신의 서양화가이다. 본관은 동복 오씨로 호는 모후산인(母后山人)이고 본명은 점수(占壽)이다. 1905년 12월 24일 한말에 보성 군수를 지낸 오재영(吳在永)과 김선군(金宣君)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지호는 1912년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3년 동복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0년 전주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나 이듬해 다시 휘문 고등보통학교의 보결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오지호는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휘문 고등보통학교의 도화 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1886~1965]이 맡고 있었다. 오지호가 그림을 시작하게 한 결정적 계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전람회를 관람하고 난 후였다. 나혜석의 작품에서 느꼈던 유화의 강렬한 색채와 힘찬 붓놀림 등은 오지호가 유화에 몰두하는 충분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1922년 오지호가 17세 되던 해 휘문 고등 보통학교 3학년인 그는 그의 어머니가 물색해 두었던 규수 지양진과 혼례를 치른다. 오지호는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학교 생활을 이어갔다. 오지호는 1923년에 고려 미술원에 다니며 목탄 데생과 그림에 대한 이론 공부를 충실히 해 나갔고, 1925년에 휘문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양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하게 된다.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찾던 오지호는 동경 미술 학교에 입학을 결심하지만 낙방한다. 그 후 1년 동안 동경 미술 학교의 예비 단계 격의 가와바다 미술학교에 들어가 1년간 이론과 실기 실력을 더 쌓았다. 1926년에는 다시 동경 미술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5년 동안 수학하였다. 오지호의 동경 미술학교 유학 생활은 작가로서 나아갈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동경 유학 생활은 한국 자연을 생각하고 그에 맞는 조형과 색채를 연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시간이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오지호는 민족 미술을 강조하는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녹향회’에 가담하여 활동을 했다. 이후 일본 관전에 대항한다는 이유로 총독부의 탄압을 받게 되어 민족적 미술 활동은 잠시 중단하게 된다. 1932년에는 고향인 화순으로 내려와 칩거하다가 녹향회 활동을 함께 했던 김주경[1902~?]의 권유로 1935년에는 개성 송도 고등보통학교에 도화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 때 그의 걸작 ‘남향집’이 탄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주경과 함께 한국 최초의 원색 화집인 『이인화집』을 발간하였다. 이 화집은 오지호의 예술세계와 1930년대 우리나라 서양화단을 실증적으로 대변한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후 오지호는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순수회화론」[1938], 「피카소와 현대회화」[1939],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1940], 「구상회화 선언」[1959], 『논집 : 현대 회화의 근본 문제』[1968] 등의 글을 남기며 회화 이론에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교육자로서 오지호는 해방 후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조선 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맡게 되었고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이 때 후학들에게 자신의 조형과 색채에 대한 생각을 가르쳤고, 전라남도 화단의 성격을 이루는 향토적인 회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전라남도 지방의 미술 발전에 헌신하였다.
1965년에는 전라남도 지역의 서양화 발전을 위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전라남도 미술대전을 창설하는 데 힘을 보탰다. 1968년부터 1973년까지는 대한민국 미술 대전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고, 1973년에는 국민 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1976년에는 대한민국 미술 대전의 운영 위원을 역임하였고 1977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이로써 오지호는 한국 화단에 힘써 왔던 공을 인정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인 2002년에는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오지호는 서구의 인상주의를 한국의 환경에 맞도록 해석하고 표현한 화가이다. 자신이 연구한 회화 이론과 표현 방법을 교육한 교육자로 우리나라 서양화의 발전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이다.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 출신 모후산인 오지호는 1982년 12월 25일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는 200여 점에 가까운 작품과 회화관, 예술관 등을 남겼고, 그가 떠난 지 30여 년이 흐른 2013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서양 화단의 큰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오지호·김주경의 『이인화집』]
오지호는 1926년부터 5년간의 동경 미술 학교 일본 유학 생활을 하였고 이 때 서구 인상주의 회화에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은 조선의 색감을 찾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져 귀국 후 인상주의를 우리 화풍에 맞게 구사하였고 이러한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였다. 이는 1938년 발간된 오지호·김주경의 『이인화집』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인화집』은 오지호와 김주경이 고려 미술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일본 유학, 1928년 김주경에 의해 조직된 녹향회 활동에 탄력을 받아 이루어졌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이인화집』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1935년 개성 송도 고등 보통학교의 도화 교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집 속 작품 세계는 조선적 회화에 대한 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품에는 조선의 자연 풍경을 주로 하여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 하였다. 오지호가 그린 풍경화들은 조선 어느 곳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들로, 실제 사생과 자연의 풍경에서 받은 감흥을 표현하였다. 오지호의 그림은 당시 조선 미술 전람회의 아카데미즘적 향토색과는 달리 평범한 풍경들이다. 오지호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개인의 시각으로 풍경을 바라본 것으로 일종의 조선 미술 전람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지호는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조선의 명쾌한 일광을 나타냈다. 작품에는 주로 흰색을 사용하여 명도를 높였고, 노란색과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진한 남색과 초록색을 함께 사용하여 대비 효과를 높였다. 해방 직후 1945년 12월에는 『신세계』의 창간호인 「자연과 예술」에서 “조선의 대기는 원근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청정하다”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이 맑고 투명한 색채를 사용함에 대한 글을 남겼다.
오지호는 『이인화집』의 야외 풍경을 통해 자신이 주장한 명도와 채도가 높은 조선의 색채를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밝은 색조를 통한 명쾌한 조선의 자연’이라는 요소를 확인시켰다. 또한 생명력 넘치는 긍정적인 조선, 밝은 조선 등을 조선인의 보편적 감성으로 받아들여 조선 미술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색채주의와 회청 색조로 보여주는 자아 표현]
오지호는 인상주의적 회화를 우리 풍토에 맞는 색채로 정립하여 자신의 예술 세계를 형성하였다. 그 핵심은 미의 본질을 자연 속의 빛과 색채로 보고 회화 표현에 있어 순수주의를 주장하였다. 형상 변형에 있어서는 데포름(deform)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1960년대 이후에는 야수 주의적 색채 주의로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1956년 8월 『조선 일보』에 기고한 「데포르메(Deformer) 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마음 안으로 들어올 때 대상은 벌써 현실의 자연과 다른 곧 변개(變改)된 자연이고, 그런 인간 심경의 작용이 창조의 본능이다” 오지호 회화의 자유분방한 붓질 감각과 간결한 구성미는 바로 이 「데포르메 론」에서 나온 것이다.
오지호는 우리 색을 찾아 회화에 표현한 색채주의자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4·19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시련을 겪은 뒤 그의 색채는 암울한 회청색으로 표출되었고 단순한 구도와 거친 붓 터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과거에는 밝고 정돈된 회화 이미지였지만 시련을 겪은 후 대조적으로 표현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이 당시 그림들은 오지호의 어두운 정신세계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1963년 「야산 풍경」, 1965년 「추경」, 1965년 「목포항」, 1967년 「항구」 등은 오지호의 회화에서 회청색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야산 풍경」은 이전에 비해 어두운 분위기와 단순화된 형태로 데포르메 되었고, 「추경」은 거친 마티에르(material)를 통해 볼륨감 있게 표현되었다. 「목포항」은 삼학도의 흰 모래밭에서 바라다 보이는 목포의 모습을 그리면서 마치 폭풍이 일기 전 고요한 때와 같은 바다의 모습을 자신의 내부에서 걸러내어 절대적 색감으로 표현하였다. 「항구」는 단순한 구성과 중첩의 표현을 통해 거칠면서도 신속하고 가벼운 붓놀림을 통해 재현을 중심으로 했던 과거의 표현에서 점차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가는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자신감 넘치는 표현주의적 붓 터치와 예술 세계의 정점]
1970년대부터 1982년까지 오지호의 작품들은 산, 항구 등을 그린 풍경화와 석류, 아마릴리스(amaryllis) 등을 그린 정물화가 주를 이뤘다. 이 시기 작품들은 마티에르 효과가 두드러지고 자유분방한 필획을 사용하여 더욱 표현주의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을 띠었다. 인상파 회화에 심취해 꾸준한 변모를 거치며 최종적으로 나타난 그의 회화적 성격은 자유로운 색채 처리를 통한 화면의 재구성으로 표현주의적인 그림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70년대에는 1960년대 보여주었던 회청 색조에서 벗어나 밝은 색채를 되찾고, 밝은 빛과 색채 감각으로 1973년 「가을길」, 1977년 「함브르그항 풍경」, 1976년 「5월 풍경」, 1979년 「설경」 등의 작품을 남겼다. 이때의 작품은 격렬한 붓 터치와 극히 절제된 원색의 효과 등으로 회면에 신선한 생기를 불어 넣어 표현 욕구가 원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또한 대상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추상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이렇듯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까지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으로 연구해오던 오지호의 그림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고 자신감 있게 변모하였다.
1981년 말년에 이르러 「속초항 풍경」, 「초가집」 등의 작품에서는 단순화되어 보이면서 안정감 있는 구도 및 회청색과 흰색의 조화로운 색감이 나타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빛과 색에 평생을 바친 열정과 자신감에서 발현된 표현이다.
[민족 미술과 한국적 인상주의]
일제 강점기에 나라가 혼란을 겪으면서 많은 작가들이 반민족적 친일 행적을 보이거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것과 달리 오지호는 민족주의적 화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민족 미술을 위한 신 미술 운동을 전개한다는 이념으로 조선 총독부가 개최한 ‘조선 미술 전람회’에 대항하여 반일 의식이 강한 ‘녹향회’ 활동을 했다. 1940년대 초반 창씨개명을 반대하였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 기록화 제작 의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일제에 맞섰다. 1945년~1946년에는 ‘조선 미술 건설 본부’의 서양화부 중앙 위원을 맡았고 독립 미술 협회를 결성하여 조선 프로레타리아(proletarian) 미술 동맹과 연합한 ‘조선 미술가 동맹’의 미술 평론부 위원장 등의 간부직을 맡아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함께 진보적인 미술계를 만들려는 실천에 앞장섰다. 오지호는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이 없이는 바른 민족 예술이 바로 설 수 없다고 주장하며 때에 따라 붓 대신 총을 들어 민주사회 건설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 전체에 공통되는 감성과 쾌적한 것으로서의 미술을 표현하려 했다.
녹향회 활동이나 전쟁기록화 제작 거부 등과 같은 민족 미술에 대한 의지는 우리나라 자연에 대한 긍정적 주체적 자각의 내용으로 구체적 회화 방법의 형식에서 나타났다.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체득한 서구의 인상주의를 답습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자연과 기후에 맞는 빛과 색채를 통해 한국적 인상주의를 완성하였다. 이는 오지호의 회화 이념이 인상주의의 한국적 수용에 대한 노력으로 한국의 근·현대 회화사에서 한국적 구상 화풍을 자리 잡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혹자는 인상주의의 수용이 형식에 치우친 경향이 짙어 현실 참여적 민족 미술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하지만 동 시대 화가들에 비해 시대정신과 예술가적 시각이 앞서 있었고,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직접적인 메시지의 전달보다 독창적인 조형 어법으로 한국 자연의 특징에 대한 표현을 이룬 것이 한국의 미술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민족 미술을 위한 예술가의 사회적 실천과 한국적 인상주의 미술의 정착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오지호는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주체적 표현과 회화 이론의 정립을 한 현대 회화사에 중요한 성과를 남겼고 현재까지도 한국 서양화단의 거목으로서 그의 정신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