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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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靜菴趙光祖先生謫廬遺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남정리 173-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희태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482년 - 조광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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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519년 - 조광조 능주 유배 사사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19년 - 조광조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67년 8월 -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8월 3일 -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전라남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남정리 173-2] |
성격 | 유허비 |
양식 | 석비[거북좌대 비몸, 비머리]|보호각 |
관련 인물 | 조광조[1482~1519]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너비,두께) | 270㎝[총 높이]|160㎝[비 높이]|82㎝[너비]|35㎝[두께] |
소유자 | 공유 |
관리자 | 정암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 조광조의 유허비.
[개설]
조선 시대 중종 때 학자로 개혁 정치를 추구했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기묘사화로 능주에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는데 1667년(현종 8) 8월 유배지에 유허비를 세웠다.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글씨를 썼다. 비문의 전서는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1630~1687]의 글씨이다. 거북 형상의 좌대에 비몸을 올리고 이수형의 비머리를 갖추고 있다. 맞배 기와집의 보호각 안에 있다. 적려(謫廬)란 유배되어 간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 두는 비를 말한다.
[건립 경위]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는 조선 시대 1667년(현종 8) 4월에 능주 목사 민여로(閔汝老)[1598~1671]가 주도하여 우암 송시열에게 비문을 받고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와 둔촌 민유중의 전서 글씨로 새겨 세웠다.
[위치]
화순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는 화순군 화순읍 화순군청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0㎞ 거리 능주면 잠정리에 있다. 국도 29호선을 타고 능주 IC에서 오른쪽 학포로를 따라 내려가다가 능주면 소재지 석교 회전 교차로에서 도곡 온천 방면으로 지방도 822호선 지석로를 따라 정암길에 다다르면 200m 지점에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 유허 비각이 있다.
[형태]
거북 좌대 위에 홈을 파서 비몸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조선 시대 유허비이다. 정면 측면 각 1칸의 맞배 지붕집 보호각 안에 있다.
적려 유허비는 조선 시대 능주목 북문이 있었던 곳 부근 길가에 있는데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이다.
비몸에는 앞면에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위부분에 ‘정암 조선생 추모비’라는 전서(篆書)를 새겼고 아랫부분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기’라고 음기하였다. 비기의 내용은 비석을 세운 곳이 적거하던 집이고 명을 마친 옛터[遺址]라는 점,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지 149년째가 되어서도 선비들이 흠모가 이어지며, 정포은(鄭圃隱)과 김한훤(金寒暄)이 있었지만 정호와 주희의 연원을 계승하고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으로서 학문의 표준을 삼은 것은 선생에서 시작되었다는 점, 정암의 출자와 급제, 대사헌 재임 때인 11월 기묘사화와 유배, 관노 문후종의 집에서의 적거, 12월 20일의 사약에 의한 죽음, 금상 정미년(1667, 현종 8)에 능주 목사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는 내용에 이어 끝에 명(銘)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비 본문과 구별 없이 연이어 연대와 비문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 전서를 쓴 사람의 관직명과 성명을 새겼다. 비문은 의정부 우찬성 겸 성균관 좨주[祭酒] 세자이사 송시열이 짓고 충청도 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이 전서하고, 원임 의정부 좌참찬 겸 성균관 좨주 세자시강원 찬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이다.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1982년, 1983년, 1997년에 보수하였으며, 1986년 강당[정면 5칸, 측면 2칸]과 영정각[정면 3칸, 측면 1칸]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유배 생활을 하던 초가를 복원하여 적려 유허비 주위를 정화하였다.
유허 비문에는 12월 20일 사약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중종실록』 중종 14년 12월 병자일[16일] 사사되었다고 나와 고증을 요한다.
[금석문]
앞면에 1행 내려쓰기로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라 음각했으며, 뒷면에는 윗부분에 전서로 ‘정암 조선생 추모비(靜菴趙先生追慕碑)’라 가로쓰기로 쓰고 아래 부분에는 ‘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기(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記)’를 내려쓰기로 음각하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前面)
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
(陰記)
靜菴趙先生追慕碑(篆書)
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記
嗚呼此 靜菴趙先生謫廬而仍爲臨命之遺址也鳴呼今去己卯之歲百四十有九年而」
學士大夫慕其學黎民胥徒懷其澤愈久而愈不忘皆曰使我東偏知君臣父子之倫免夷」
狄离獸之城者 先生賜也其過此者無不肅然致敬嗚呼此孰使之然哉基秉彝之心自」
然而然爾嗚呼彼袞貞景舟之徒果何人哉蓋我箕邦自殷師以後上下數千年間道學堙」
晦閒有鄭圃隱金寒暄諸賢前後倡明之然其承洛建之淵源志唐虞之熙雍卓然以明德」
新民爲此學之標準者則肇自 先生不可誣也」 先生諱光祖字孝直漢陽人成化壬寅」
生焉正德庚午進士壯元乙亥及第官至大司憲己卯十一月禍作是月謫居于此屋主」
官奴文厚從也翌月二十日後 命至焉今 上丁未則崇禎紀元之四十季也本州牧」
閔候汝老懼久而失其處建碑以表之者程夫子潁樂享銘曰水不忍廢地不忍荒嗚呼正」
學其何可嗚呼斯可以銘此碑矣四月丙辰後學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兼成兼成均館祭」
酒世子貳師宋時烈記正憲大夫原任議政府左參贊兼成均館祭酒世子侍講院贊」
善宋浚吉書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閔維重篆
[현황]
조광조 적려 유허비는 비각을 건립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으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1979년 8월 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초가집 등 유배 적거 관련 시설물을 복원하였다. 관리 주체는 조광조의 후손인 한양 조씨 문중에서 하고 있으며, 화순군에서 지정 문화재로 관리를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전기의 대학자로 개혁 정치를 표방했던 정암 조광조 선생의 유배지에 세운 유허비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귀중한 금석문이며 화순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 현장으로서도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