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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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弘載 |
이칭/별칭 | 덕흥(德興),죽은(竹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560년 - 최홍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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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최홍재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최홍재 의병 활동[1592]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최홍재 의병 활동[1597]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최홍재 서장관으로 중국 다녀옴 |
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최홍재 좌천 |
몰년 시기/일시 | 1614년 - 최홍재 사망 |
묘소|단소 | 최홍재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강남곡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해주(海州) |
대표 관직 | 사헌부 지평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덕흥(德興), 호는 죽은(竹隱).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천부(崔天符)이고, 아버지는 진사 최경운(崔慶雲)이며, 어머니는 달성 배씨 배온(裵溫)의 딸이고, 천안 전씨 전응각(全應角)의 딸과 파평 윤씨 윤덕순(尹德純)의 딸, 그리고 청주 한씨 한영(韓瀛)의 딸과 혼인하였다. 최경회(崔慶會)의 조카이다.
[활동 사항]
최홍재(崔弘載)[1560~1614]는 문무를 겸하였으며, 1591년(선조 24)에 문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명을 따라 의병을 모아 고경명(高敬命)의 막하로 가는 도중 고경명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작은 아버지 최경회(崔慶會)를 도와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후에 정언(正言)으로서 초토사(招討使)에 제수(除授)되어 의병을 모아 왜적을 방비할 수 있는 방책을 강론하였다. 정유재란 때 아버지 최경운(崔慶雲)이 오성산에서 순절하자 복수를 도모하던 중 왜적이 물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를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1607년에는 서장관으로서 중국에 다녀왔으며, 1613년(광해군 5)에 흉론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가 간신들에 의해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좌천된 후 울분 속에서 병이 발생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학문과 저술]
『행대록(行臺錄)』이 있다
[묘소]
묘는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강남곡(江南谷)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