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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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渭南 |
이칭/별칭 | 경섭(景涉),구봉(九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동교 |
출생 시기/일시 | 1574년 9월 9일 - 양위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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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0년 - 양위남 진사시 합격 |
몰년 시기/일시 | 1633년 8월 30일 - 양위남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50년 - 양위남 정려를 내림 |
출생지 | 양위남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
정려 | 양위남 정려각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제주(濟州) |
대표 관직|경력 | 중부 참봉(中部參奉)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문인.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호는 구봉(九峯).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현손이다. 양응기(梁應箕)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양인용(梁仁容)이고, 어머니는 풍산 홍씨(豊山洪氏) 홍진(洪縝)의 딸이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문관도(文貫道)의 딸이다.
[활동 사항]
양위남(梁渭南)[1574~1633]은 어려서부터 재기(才氣)가 남달랐고,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궁마(弓馬)에도 능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중부 참봉(中部參奉)에 임명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에 격문을 돌리고 정열(鄭悅)·배경생(裵慶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정묘호란에도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전주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북향 재배한 뒤 돌아왔다. 나이 60에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하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650년(효종 1)에 그의 효행을 높이 평가하여 정려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