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5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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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樂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용식[李庸植]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소리를 소재로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고유의 전통 음악.
[개설]
국악은 우리의 전통 음악을 일컫는다. 전라남도 화순군에서는 양반들이 즐기던 시조(時調), 가곡(歌曲), 가사(歌詞) 등의 풍류 음악과 민간 예술인 판소리, 산조(散調), 그리고 민중의 음악이었던 민요(民謠)와 농악(農樂)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이 전승되고 있다.
[화순군의 풍류 음악]
화순군에는 일찍이 풍류방이 있어 풍류 음악이 발달했다. 1930년대 화순군의 토반(土班)으로 큰 부자였던 오판기(吳判基)가 풍류를 좋아해 집안에 풍류방을 꾸며 놓고 많은 악사를 불러 들여 풍류를 즐겼는데, 이를 오판기 풍류방이라 한다. 오판기 풍류방의 풍류객으로는 가야금·대금·피리의 명인 한수동(韓壽同)[1895~1940], 피리의 명인 정학기(鄭學基), 가야금의 명인 박경식(朴京植), 대금의 명인 한주환(韓周煥)[1904~1965], 피리의 명인 오진석(吳晋錫), 가야금의 명인 정남옥(鄭南玉)[1902~?] 등이 있다. 또한 화순군의 명망 가문인 신안 주씨 집안에서도 당대의 풍류객들이 배출되었는데, 주기준(朱基俊)[1904?~?], 주재성(朱在成)[1910?~?], 주재현(朱在鉉)[1895?~?] 등을 들 수 있다. 이 외에도 화순군 출신의 풍류 명인으로는 구대진(具大振)[1880?~?], 김규열(金圭烈)[1910?~?], 거문고의 임석윤(林錫潤)[1905?~?] 등을 들 수 있다. 화순군의 기생 출신 풍류객으로 김산옥(金山玉)[1875?~?], 김산월(金山月)[1875?~?], 신초월(申初月)[1875?~?], 양농주(梁弄珠)[1875?~?], 양학(梁鶴)[1875?~?] 등이 있었다.
[화순군의 신청]
화순군 능주 지역에는 신청(神廳)이 있었다. 신청은 주로 무가(巫家) 집안의 남성 악사인 재인(才人)이 음악을 교육하고 훈련하던 기관이었다. 구한말 능주 신청 출신의 음악가로는 능주 신청의 우두머리인 대방(大房)을 역임했던 조상엽(曺相燁)[1860?~?], 대금 및 피리의 명인이었던 조병문(曺秉文)[1880?~?], 피리 명인이었던 김홍순(金洪淳)[1894?~?] 등이 있다.
[화순군 출신의 명인 및 명창]
화순군은 예향의 전통을 잇는 고을답게 수많은 판소리 명창과 고수를 배출했고, 악기의 달인도 배출했다. 판소리 명창으로는 이진영(李珍英)[1875?~?, 여성], 정명수(鄭明洙)[1895?~?] 등을 들 수 있다. 화순군에는 뛰어난 고수가 많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김학섭(金鶴燮), 문남구(文南龜)[1919~?], 오재민(吳在珉)[1918~?, 고수, 전주 대사습 고수 대회 장원], 조병현(曺炳鉉)[1885?~?], 조환서(曺桓瑞), 주봉현(朱鳳鉉)[1875?~?], 주응조(朱應祚)[1875?~?]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주봉현은 “능주 주봉현 선생 북에 때를 벗겨야 올바른 기생 광대 노릇 한다”는 소문이 퍼져 전국에서 소리꾼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당시 국창으로 손꼽히는 송만갑, 유성준, 이동백, 임방울, 김연수 등이 주봉현의 북에 소리를 다듬었다.
화순군 출신의 악기 명인으로는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한숙구(韓叔求)[1865~?]와 그의 아들이자 가야금의 명인이었던 한수동(韓壽童)[1895~1940]이 있다. 한숙구의 가야금을 계승한 가야금 명인으로 안기옥(安基玉)[1894~1974], 정남옥(鄭南玉)[1902~?] 등이 있다. 중요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 예능 보유자였던 정달영(鄭達榮)[본명 정재국(鄭在國), 1922-1997]과 그의 형 정백옥(鄭白玉)[1905?~?]도 화순 출신이다. 또한 대금 명인들도 배출했는데, 중요 무형 문화재 제45호 대금 산조 예능 보유자인 김동표(金東表)[1941~ ]와 한주환류 대금 산조의 창시자인 한주환(韓周煥)[1904~1966] 등이 있다.
[화순군의 농악]
화순군에는 농민들이 농사일을 하거나 정월 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 등의 명절을 맞아 마을 주민들의 화합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농악도 발달했다. 특히 화순 한천 농악은 1979년 전라남도 무형 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고, 노승대가 예능 보유자로 인정되어 있다.
[화순 국악의 현황]
현재 화순군에는 화순 국악 진흥회, 한국 국악 협회 화순 지부, 호남 연정 국악 연수원 등의 기관이 국악의 전승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이 외에 국악 동호인 친목계인 국악계(國樂契)가 있다. 이 모임은 1972년 조기철을 중심으로 이광옥 외 6명이 모여서 계를 만들어 국악의 활성화를 도모한 단체이다. 또한 화순군의 애향 인사인 강동원[1940년생]을 중심으로 김옥철, 김사갑 등과 함께 명창 하재옥에게 판소리를 배우면서 뜻을 모아 1965년 국악 동호인 친목계인 ‘서양계(瑞楊契)’를 만들어 국악의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화순군은 풍류 음악 및 판소리, 산조 등 국악이 매우 발달했던 고장이다. 1930년대까지도 지역의 명사였던 오판기의 풍류방을 중심으로 풍류객들이 활동했고, 지역의 명망 가문인 신안 주씨 집안 출신의 풍류객들이 많았다. 또한 판소리 명창과 고수도 많이 배출했는데, 주봉현과 같은 당대 최고의 고수가 화순 출신이다. 화순군은 가야금 음악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초창기 가야금 산조를 짠 한숙구와 그의 아들 한수동을 비롯하여 안기옥, 정남옥, 그리고 중요 무형 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의 예능 보유자였던 정달영 등의 가야금 명인을 배출했다. 또한 대금 명인인 김동표와 한주환도 화순군 출신이다. 이런 국악계의 명인·명창을 통해 일제 강점기 이후 국악의 발전에 이바지하여 화순군은 국악의 성지(聖地)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