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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1919
한자 冠禮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집필자 한미옥

[정의]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성년이 된 남녀가 치르는 성년식 혹은 입사 의례.

[개설]

관례는 성년이 된 남녀가 치르는 성년식 또는 입사 의례(入社儀禮)이다. 민속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사춘기 의례[rites of puberty]의 하나이다. 사춘기 의례란 모성적 유대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에 이른 남녀가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갖춘 성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 의례인데 관례의 의미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관례는 상투를 틀어 갓[冠巾]을 씌우는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가지 절차이다. 남자 아이는 15세가 넘으면 관례를 행하고 그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였다. 한편, 여자 아이는 쪽을 지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 계례(筓禮)를 행하였다.

현재 화순 지역에서 관례는 현행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관례를 행했다는 사람들도 약식의 관례를 경험한 정도이다. 즉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화순 지역에서 행해졌던 관례의 실상을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제보자들의 기억을 종합해보면, 화순 지역에서의 관례혼례를 올리기 전에 관자의 아버지나 주례자가 관자에게 상투를 틀어주고 성주에 고한 다음 의례를 치르고 마을 어른들을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푸는 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관례는 토착적·민중적 문화가 아닌 일종의 상층 문화로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관례 의식은 『가례』의 유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례』의 유입 이전인 고려 시대에도 관례의 기록이 나타난다. 『고려사』에는 광종·예종·의종 때에 왕태자의 관례를 행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고려 왕실에서도 유교식 관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사대부 집안에서는 예서에 따라 관례를 행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서보다 간소하게 행하였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와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단발령을 실시해 머리를 깎았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관례는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여자들의 계례는 남아 오늘날 전통 혼례식에 흡수되어 있는 정도이다.

[절차]

『문공가례(文公家禮)』나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의하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조혼의 습속으로 인하여 혼기가 빨라지자 관례도 빨리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관례의 순서를 보면, 관례를 행할 때는 예정된 날짜보다 3일 전에 주인이 사당(祠堂)에 고하고 계빈(戒賓)이라고 하여 손님을 청하여 관례 전날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삼가례(三加禮)를 행하는데, 그 절차는 초가례(初加禮) → 재가례(再加禮) → 삼가례(三加禮) → 초례(醮禮) → 자관자례(字冠者禮)의 순이다.

화순 지역에서 행해졌던 관례는 오래전에 의식이 단절되었기에 자세한 순서는 알 수 없지만, 화순의 민간인들은 관례혼례와 함께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순 지역 제보자들의 기억에 의한 관례의 순서를 보면, 먼저 혼례를 올리기 전에 관자의 아버지나 주례자가 관자에게 상투를 틀어준다. 다음으로 관자는 성주에 성인이 되었음을 고한 다음 일반적인 관례의 순서에 따라 의례를 치르고, 마지막으로 마을 어른들을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푸는 식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주례는 주로 선생이나 덕망 있는 사람이 했는데 상투를 틀어주고 갓을 씌워 주고 자(字)를 지어주며 축사를 하고 교훈을 말해줬다 한다. 또 혼인이 결정되어 사성을 보낸 다음 신랑 집에서 동네 어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함으로써 관례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현황]

화순 지역에서는 특별히 유교의 『사례편람』에 의한 성년식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민간에서는 유교식의 성년식을 따로 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남녀가 혼례식을 올리면 이것이 바로 성년식이라고 관념하였는데,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남자는 ‘상투 틀기’ 또는 ‘상투 올림’이란 것을 하였고 여자에게는 귀밑머리를 얹어주었다. 즉 이것들은 혼인의 한 과정에서 행해진 것으로 여기에서 관례나 계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화순읍 삼천리의 조복환은 총각 때 댕기를 따고 다니다가 21세에 관례를 한 뒤 몇 달 있다가 결혼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머리를 깎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자신은 댕기를 땋고 다녔기 때문에 보통 학교도 다니지 않고 서당에서 한문만 배웠다. 21세에 혼례를 앞두고 댕기를 풀고 상투를 꽂았는데 머리를 위로 올려서 돌려 가지고 동곳에 끼었다. 그러나 자(字)는 지어 받지 못했고, 그때는 관례를 거의 행하지 않았다. 관례 후에는 어른들이 말을 올려주고 어른 대접을 해줬으며 자신도 행동거지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이양면 구례리 괴화동의 서재풍에 의하면, 자신은 관례를 하지 않고 7~8세 때 당숙들이 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나이 20세를 전후에 길일을 택하여 행했는데, 관례를 올리는 날 아침에 주례가 관자(冠者)에게 목욕재계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도록 말한다. 그러면 관자는 몸을 씻고 옷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집안이나 마을의 어른들이 계시는 청사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러면 아버지가 사당에 가서 자식이 관을 쓰게 되었다고 고한 다음 집안 어른들과 함께 동석하여 관자의 댕기를 풀어 머리를 빗기고 머리를 올려서 상투를 조진다. 그 다음 제일 연장자가 관자에게 망건을 씌어주고, 이어서 다시 근친자가 관을 씌워준다. 이렇게 관을 씌우고 다시 사당에 가서 성인이 되어 관을 썼다는 사실을 고하는 관례 고사를 올린다. 이어서 사당에서 나와 주례와 어른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자를 지어주기도 하고 이후 서당의 선생님이 자를 지어주기도 한다. 관례를 올리기 위하여 빗과 망건, 갓, 술, 대추, 밤 등을 가져다가 관례상을 차린다. 또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놓는데 관자의 머리를 빗길 때 그 물을 사용한다. 관례 때 입는 옷은 혼례에 입는 대례복과 같다.

한편 화순 지역 농민들 사이에서는 유교식의 관례와는 별개로 어린 농군이나 초군은 어른 일꾼이 되는 의례를 치르는데 이것을 ‘진세례’라 한다. 특히 관례가 화순 지역 상류층에서 행해졌다면, 진세례는 농민과 같은 민중에서 활발하게 행해졌다. 진세례는 어린 일꾼이 17세쯤 되면 먼저 작업 능력이 어른 농군과 대등한가를 시험받게 된다. 능력의 평가 방법은 들독을 일정한 높이까지 들어 올리게 하거나 김매는 능력을 시험해보는 것 등이 있다. 들독 들기나 김매기가 단순히 힘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조화롭게 쓸 수 있는 능력과 작업의 요령을 동시에 갖춰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어른 농군이 되는 자격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이용된 것이다. 만약 어린 농군들 중에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진세가 되어도 좋다는 평가를 받으면 유월 유두나 칠월 백중 날에 음식을 장만해서 마을 어른들을 대접했다. 만약 진세가 될 사람이 머슴살이를 하면 그의 주인이 진세 턱을 내고 새경도 상머슴 몫으로 주었다. 이렇게 진세례를 치르면 당당한 어른 농군으로 대접받는 진세가 된다. 곧 어른들과 대등하게 두레나 품앗이에 참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화순 지역의 관례는 현재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년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정한 성년의 날에 20세가 된 남녀들이 서로 장미꽃을 주고받으며 축하하는 양상으로 간략화 되어 행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지만 화순 지역의 전반적인 사례라고는 할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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