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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300786
한자 金昌協
영어음역 Gim Changhyeop
이칭/별칭 중화(仲和),농암(農巖),삼주(三洲),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제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양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1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69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8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8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689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708년연표보기
묘소|단소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 관직 청풍 부사

[정의]

청풍 부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다.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며,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딸이다. 형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이 있다. 6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입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으로 출사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승명교정(承命校正)하였다. 1687년(숙종 14) 청풍 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현재 청덕비는 청풍문화재단지 내에 옮겨져 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응암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 참의·예조 참판·홍문관 제학·이조 참판·대제학·예조 판서·세자우부 빈객·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에 성품이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분별할 때는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말을 막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선입관을 갖지 않아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저술]

문장은 단아순정(端雅純正)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시는 두보(杜甫)의 영역에 출입하였으나 답습과 조회(藻繪)를 일삼지 않고 고고건아(高古健雅)하였다고 평가받는다. 학문은 이황(李滉)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성악론변(性惡論辨)」에서는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대체로 이기설은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저술로 『농암집(農巖集)』,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논어상설(論語詳說)』, 『오자수언(五子粹言)』, 『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남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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