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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629
한자 柳昌國
영어음역 Yu Changgu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호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성별
몰년 1637년(인조 15)연표보기
본관 문화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고려 고종 때의 대사성 유경(柳璥)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유창국(柳昌國)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진천 만노산성(萬弩山城)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성에는 인근 7읍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피난민이 통솔자가 없는 무질서 상태에 있었다. 이에 유창국은 포의(布衣)의 신분이었으나 조감(趙感)과 함께 피난민들의 대오를 정비한 다음 돌을 날라다 성을 수축하고 나무를 베어 성책을 꾸몄다. 또 활과 화살을 만들고 장정들을 요충에 배치하여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부녀자들까지 전비를 갖추게 하였다.

마침내 적이 공격해오자 북을 치며 독전하니,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에 유창국은 전군에 이르기를 “적은 내일 또 올 것이니,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 당부하여 전비를 가다듬고 뒤이을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다시 공격해오니 유창국은 하루 종일 성 위에 올라가 전투를 독전하였다. 이에 적은 또다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가서 다시는 공격하지 않았으므로, 7읍의 주민 수천 명이 그의 지휘에 힘입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상훈과 추모]

전후 관찰사 정인규(鄭仁規)가 중의를 듣고 품의하여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었는데, 유창국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병으로 운명하였다. 1716년(숙종 42) 지부원외랑(地部員外郞)에 추증되었다가, 1851년(철종 2) 공적에 비해 그 지위가 적당하지 않다는 공론에 의거하여 유림 정재경(鄭在褧) 등의 상서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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