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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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弩山城 |
이칭/별칭 | 만뢰산성,이을산성,만노성(萬弩城),만뢰성(萬賴城),이을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하수문 절골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박상일 |
성격 | 성곽|산성|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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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테뫼식 |
건립시기/연도 | 신라시대 |
관련인물 | 김서현(金舒玄)|유창국(柳昌國) |
둘레 | 약 1.2㎞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보련마을 산 2-10|보련마을 산 2-2|보련마을 산 2-9|보련마을 산 46|백곡면 대문리 하수문 절골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와 백곡면 대문리 사이에 있는 신라시대 석축 산성.
[개설]
만노산성(萬弩山城)은 문헌 기록에 만노성(萬弩城)·만뢰성(萬賴城)·이을성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현재는 만노산성 또는 만뢰산성으로 불린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표기된 바에 따라 이을산성이라 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건립경위]
만노산성의 축조에 대한 정사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의 토기편, 신라시대의 기와편, 고려시대의 그릇 조각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어서 삼국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병자호란 때에도 입보(入保)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뢰산(萬賴山)[611.7m]은 경상북도 진천의 삼국시대 지명인 만노군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지명이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만뢰산은 신라 때의 만노군 읍묘(邑廟)로서, 김유신(金庾信)[595~673]의 아버지인 김서현(金舒玄)이 태수(太守)가 되어 백제에 대항할 때 만뢰산에 만노산성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위치]
만노산성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보련마을과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 하수문 절골 사이에 있는 만뢰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고을 서쪽으로 약 9.42㎞에 있었다고 하며,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유창국(柳昌國)이 조감(趙感)과 함께 만노산성을 지켰는데 그 동쪽에 장대지가 있다고 하였다.
[형태]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석축으로 둘레는 약 1.2㎞이고 안에 우물이 1곳 또는 2곳이 있는데 성은 이미 폐하였다고 한다. 『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만노산성은 진천의 성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성의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고 흔적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노산성은 산 정상부에 둥글게 석축의 성벽을 돌리고, 동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길게 쌓아 평면이 장타원형인 테뫼식으로 축조되었다. 만뢰산의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곳곳에 석축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장성의 형태로 남쪽을 방어하도록 길게 쌓은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현황]
최근에는 정상부를 깎아 헬기장으로 조성하면서 산정부에 있었을 장대와 같은 건물지가 파괴되어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문 터와 수구(水口)의 형태도 현재 거의 붕괴되어 자취를 알 수 없다. 헬기장의 북쪽과 남쪽에 외협축으로 쌓은 석축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는데, 석축의 상단부는 헬기장을 조성하면서 유실되었다. 만노산성 안과 주변에서 비교적 많은 양의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으며, 헬기장의 서쪽에서 능선 쪽의 길이 있는 지점에 우물지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만뢰산은 경상북도 진천 지역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으로 사방이 두루 조망되는 요새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축조된 만노산성은 진천군의 동쪽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 시설로서, 신라시대에 변방의 전초 기지가 될 만한 요진처(要鎭處)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