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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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正熙 |
영어음역 | Sin Jeonghui |
이칭/별칭 | 중원(中元),향농(香農),정익(靖翼)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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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
성별 | 남 |
생년 | 1833년(순조 33) |
몰년 | 1895년(고종 32) |
본관 | 평산 |
대표경력 | 독판내무부사 |
[정의]
개항기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무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원(中元), 호는 향농(香農). 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헌(申櫶)으로, 1833년(순조 33) 지금의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논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의 영향으로 정약용(丁若鏞)의 실학사상을 접하였으며, 초기적 개화론자에 속한다. 1895년(고종 32)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강원도 춘천의 선영 아래에 있다.
[활동사항]
신정희(申正熙)는 17세인 1849년(헌종 15)에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877년(고종 14) 좌·우포도대장을 지냈다. 이듬해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라 인천에 새로이 보(堡)를 축조하고 포대(砲臺)를 설치하였다. 1881년(고종 18) 통리기무아문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에 취임하였고, 이어서 형조판서를 거쳐 1882년에 다시 어영대장·장어대장(壯禦大將)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해 임오군란이 일어나 책임자에 대한 문책이 단행되었을 때 파직되어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고향으로 방축(放逐)되었다. 1884년(고종 21) 석방되어 다시 친군후영사(親軍後營使)를 역임하였다.
1893년(고종 30)에는 스스로 한성부윤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당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전개하고 있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봉장(封章)을 받들어 왕인 고종에게 직접 호소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동학교도들의 상경을 사전에 막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책임자를 힐책하였기에 스스로 사임하였던 것이다. 1894년(고종 31) 전국 각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호남·호서의 동학군들이 논산에 집결하여 공주성을 공격할 기세를 보였는데, 이때 호위부장(扈衛副將)의 직에 있다가 양호도순무사(兩湖都巡撫使)로 임명되어 동학군 토벌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한편 동학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거류민 보호의 명분으로 7,000명의 대병력을 출동시켰던 일본은, 같은 해 6월 전주화약을 통해 동학농민군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주둔의 명분을 상실하자 내정 개혁을 요구해 왔다. 이에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로서 동협판(同協辦) 김종한(金宗漢) 및 조인승(曺寅承)과 함께 내정개혁조사위원에 임명되고, 그 대표의 지위로 이른바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 참여하였다. 이때 일본 측 대표로 참여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제시한 27개항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내정개혁안의 세목과 실시 방안에 강경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주둔 중인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노인정회담이 결렬되자 일본 측은 조선 정부에 대해 한층 위협적인 태도로 내정 개혁을 강요해 왔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내정 개혁을 독자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일본 측의 예봉을 둔화시켜 보려는 의도에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총재관(總裁官)과 당상관을 발령했는데 이때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일본은 급기야 이 해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영입하고 김홍집(金弘集)을 수반으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신설하여 이른바 갑오개혁을 추진해 나갔고, 이때에도 새로이 조직된 친일적 신정부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국운의 쇠퇴에 따른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들어 이듬해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편서(編書)로 『훈련도감중기(訓鍊都監重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익(靖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