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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721
한자 徐翰淳
분야 종교/유교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효자
출신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석박마을
성별
생년 1848년연표보기
몰년 1909년연표보기
본관 달성(達成)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활동사항]

서한순(徐翰淳)[1848~1909]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의 바르며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뛰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마저 거르는 때가 많았으나 부모에 대한 봉양을 정성껏 하였다. 부모님을 모시는데 겨울에는 방을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일에도 시간이 어긋나지 않았다. 장성한 후에도 가세가 나아지지 않아 끼니를 거르는 때가 많았음에도 처자식들은 굶겨도 부모의 진지 봉양은 거르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병상에 눕자 갖가지 약을 구하여 먹게 하는 등 병간호에 전심을 다하였다. 극진한 병수발에도 차도가 없자 점쟁이에게서 북천(北天)에 기도를 하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혹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밤마다 얼음물에 목욕재계하고 북두칠성에 치성을 드렸다. 그런 뒤 아버지의 병환이 20여 일 만에 완쾌되어 인근에 칭송이 자자했다.

1882년(고종 19) 12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를 하면서 매일처럼 성묘를 하고 곡을 하며 눈물을 흘려 인근 주민들이 감복하였다. 유림들이 관찰사에게 건의하여 정문을 세워줄 것을 왕에게 품신하였으나 살아 있을 때 정문을 세우는 일은 어렵다 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서한순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모에게 효를 다하였다.

[상훈과 추모]

1909년(순종 3) 12월 서한순이 죽자 지방 유림들과 자손들이 주선하여 효자문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조선 강점 등 조선 말기의 혼란함으로 정려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다. 그 후 1971년 향리의 유림들이 서한순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당시의 감사·현감의 표창장을 근거로 진천군 진천읍 사석리 산59-5번지 사석삼거리에서 잦고개로 올라가는 도로변의 오른쪽 산자락에 효자문을 세웠다. 사방 한 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처마 밑에 ‘효자문’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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