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6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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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亂中雜錄 |
영어음역 | Nanjungjamnok |
영어의미역 | War Diary |
이칭/별칭 | 산서야사(山西野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 204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유종국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9월 20일 - 난중잡록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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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난중잡록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성격 | 잡록(雜錄) |
관련인물 | 조경남(趙慶男)[1570~1641]|조태희 |
저자 | 조경남(趙慶男)[1570~1641] |
번역자 | 한양조씨종친회 |
간행자 | 조태희 |
저술연도/일시 | 1585년~1637년 |
편찬연도/일시 | 1585년~1637년 |
간행연도/일시 | 1964년 |
권수 | 8권 |
책수 | 5책 |
사용활자 | 필사본 |
표제 | 亂中雜錄 |
간행처 | 한양조씨종친회 |
소장처 | 조용석 |
소장처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 204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1964년에 간행된 조선 중기의 의병장인 조경남이 남긴 잡록(雜錄).
[개설]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1570~1641]이 열세 살이던 1585년(선조 15)년부터 1637년(인조 15)까지 57년 동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물론이고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산서야사(山西野史)』라고 부르기도 한다.
난중잡록은 57년간의 대기록인지라 전질 8권을 둘로 나누어 후반 4권을 편의상 『속잡록(續雜錄)』이라 구분하기도 하는데, 난중잡록4권과 『속잡록』4권을 합해 보통 난중잡록이라 일컫는다.
일제 강점기 조경남의 10대손인 조성민이 상해 임시정부를 왕래한 관계로 자주 집 안에 일본 경찰이 드나들며 수색을 하자 난중잡록을 항아리에 담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대동야승(大東野乘)』권 26~34에도 수록되어 있다. 1984년 9월 20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편찬/발간경위]
조경남의 11대손인 조태희가 1964년 9월 필사원본 8권을 석판본 4권[춘하추동]으로 간행하였다. 2002년 한글본으로 번역되었다.
[서지적 상황]
필자 자필의 원작품 전문을 완손(完孫)이 보존하고 있다.
[구성/내용]
후손에게 보존된 초본에 의하면 제1권은 1582년~1592년 7월 사이, 제2권은 1592년 8월~1593년 6월 사이, 제3권은 1593년 7월~1598년 12월 사이, 제4권은 1599년 1월~1610년 2월 사이로 나누어 편찬되어 4권 3책으로 편제되었다.
『속잡록』은 광해군 3년부터 인조 16년까지의 기사로, 제1권은 1611년 1월~1621년 12월 사이, 제2권은 1622년 1월~1628년 11월 사이, 제3권은 1628년 12월~1635년 12월 사이, 제4권은 1636년~1638년 12월 사이로 나누어 편찬되어 4권 2책으로 편제되었다.
권두에는 기정진(奇正鎭)·최시옹(崔是翁)과 저자의 서문을, 권미에는 한익철(韓翊哲)의 발문과 저자의 11대 종손인 조태희의 간행사가 붙어 있다.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을 사료(史料)로 참고한 뒤, 그 부본을 작성해 정부에 보관하고, 원본은 1657년(효종 8)에 본가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난중잡록은 조선 중기 전란의 사료로서 당대의 정치, 문화, 사회, 당쟁, 외교 등에 대한 방대한 역사로서 그 의의가 크고 사료적 가치가 높다. 특히 임진왜란·정유재란과 관련한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루어진 자료가 많다. 이는 『난중일기』가 이순신 직속부대의 실제 전황을 기록한 것인 데 반해, 난중잡록은 양란의 전반적인 상황과 국내외 정세를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중잡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양란의 관련 기사와 그밖의 선조 연대 기사는 중요한 자료로 인증받아, 후일 『선조수정실록』을 엮을 때 조정에서 원본을 빌려 가기도 하였다. 이때 규장각(奎章閣)에서 만든 사본의 전문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