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2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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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進士-尹進士- |
영어음역 | Ijinsa Ttalgwa Yunjinsa Adeul Iyagi |
영어의미역 | Tale of a Master Yi's Daughter and a Master Yun's So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 |
집필자 | 주경미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에서 정혼(定婚)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부모가 자식들에 대해 정혼을 하면 자식들은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은 전통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정혼을 하고 부부의 연을 맺기까지 여러 위기를 맞게 된다. 이런 위기를 신의로써 극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이 이야기는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결국 부부가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1979년 8월 2일 남원시 산동면 대기리에 사는 양승환(남, 70)이 구연한 것을 최래옥·강현모가 채록하여, 1980년에 출간한 『한국구비문학대계』5-1에 실었다.
[내용]
해남에 사는 윤진사가 벼슬을 해서 한양으로 가다가 노량 나루에서 여주에 사는 이진사를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윤진사와 이진사는 딸과 아들을 낳으면 서로 결혼을 시키고, 아들만 낳으면 형제간으로 삼자고 결의를 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윤진사는 아들을 낳았고, 이진사는 딸을 낳아 놓았다.
여주 사는 이진사는 몇날 몇시에 이 둘을 결혼시키자고 해남으로 편지를 했다. 그렇게 하고는 자식이 열칠팔 살 먹도록 까맣게 잊었다. 어느 날 윤진사의 마누라가 궤짝을 열어 보니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읽어보니 여주 사는 이진사 딸과 결혼을 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아들에게 여주에 사는 이진사의 딸을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하니,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하였다. 마침 서울에서 과거를 보라는 편지가 왔다. 윤진사의 아들은 과거를 보러 집을 나서면서 이진사의 편지를 괴춤에 집어넣고 갔다.
여주쯤 올라가서 주막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죽일 놈의 자식이라며 어떤 사람 욕을 마구 해댔다. 이유를 물으니 동네 사람들이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술을 한 동이 사서 먹이고는 이유를 물었더니, “해남 사는 윤진사 아들이 죽일 놈”이라고 하였다.
해남 사는 윤진사 아들하고 여주 사는 이진사 딸하고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데, 윤진사의 아들이 종무소식이어서 결국 내일 성동놈이 장가를 온다고 했다. 그래서 이진사의 딸이 죽어도 성동놈에게는 시집을 안 간다며 오늘 저녁에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자신이 윤진사의 아들임을 밝히자 동네 사람들이 얼른 처자의 집에 가보라고 하였다.
처자의 집에 가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열두 대문이 꼭꼭 잠겨 있었다. 아무리 두드리고 발로 차도 사람 하나 나와 보지 않았다. 다시 주막으로 와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니, 안주인네가 그 집에 조그마한 개구멍이 있으니 그리로 들어가면 된다고 하였다.
개구멍을 찾아 겨우 들어가서 집 안을 둘러보니 인기척은 없고 괴괴하기 짝이 없었다. 괜히 들어왔다 싶어 나갈 구멍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들어왔던 구멍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구멍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조그만 불빛이 비치는 곳이 있었다. 가서 보니 연못 한가운데 초당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연못을 삥 둘러보니 줄이 하나 있어 잡아당기자 배가 건너왔다. 배를 타고 초당에 들어가니 처자가 큰 대야에다 찬물을 떠다 놓고 큰 칼을 열 십(十)자로 놓고는 누군가 건너오기만 하면 목을 찍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자 칼끝이 쑥 나왔다. 윤진사의 아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괴춤에 찔러 온 편지를 칼끝에 붙였다. 그러자 그 편지를 보고는 처자가 뛰어나와 어찌 여길 왔느냐며 할아버지에게 가자고 하였다. 초당을 나오면서 처자는 초당 주변에 붉은 물을 뿌려 호식(虎食)을 당한 것처럼 흔적을 남겼다. 할아버지는 윤진사의 아들에게 과거를 보러 가라고 하면서 집에 들이지 않았다.
이튿날 성동놈이 장가짐을 차려 가지고 왔는데, 그 세가 어마어마하였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호식당한 흔적만 있고 인기척은 없었다. 성동놈은 그 집에다 움막을 차려 놓고 거기서 그냥 살았다. 그러고는 커다란 송방을 차려 동네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았다.
서울에 간 윤진사 아들은 진사 벼슬을 얻은 후에 여주에 들러 마누라와 함께 해남으로 신행을 하였다. 윤진사 아들이 다시 서울에 간 뒤 마누라는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산고가 너무 심해서 윤진사는 아들에게 어서 내려오라고 편지를 써서 인편으로 서울에 보냈다.
편지를 가지고 서울에 가던 사람이 여주 근처를 지나게 되었는데, 성동놈이 이를 알아채고 술을 먹여 편지를 가로챈 뒤, “네 마누라가 서방질해서 아기를 배가지고 곧 낳게 되었으니 네가 와서 처리해라.”는 편지로 바꿔치기했다.
편지를 읽은 윤진사의 아들은, 편지를 가져온 사람의 태도를 가만히 보니 자기 자식이 분명한 듯하여 염려 말고 아기를 낳게 하라는 답신을 보냈다. 답신을 들고 가던 사람이 다시 여주 근처에 머물게 되었는데, 성동놈이 다시 그 사람에게 독한 술을 먹이고는 답신을 꺼내어 찢어 버리고, “당장에 치워 버리시오.”라는 답신으로 바꿔치기했다.
답신을 받은 윤진사는 하인들을 시켜 며느리를 강에 내다버리라고 하였다. 하인들이 며느리를 가마에 태워 메고 나가는데, 갑자기 성동놈이 나타나서 가마를 덜컥 잡고는, “내가 이 사람을 데리고 흔적 없이 어디로 가버릴 것이니, 너희들은 우리 송방을 차지해 갖고 살아라.” 하였다.
하인들은 사람을 죽이기도 그렇고 한데 거기에다 송방까지 준다고 하니 좋아라 하고 가마를 성동놈에게 넘겨주었다. 성동놈이 송방을 하인들에게 돌려주러 간 사이, 각시는 가마에서 도망 나와 산 속으로 도망갔다.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가던 각시는 숯막을 발견하고 들어가 아이를 낳았다. 이튿날 숯막에 올라온 노총각은 깜짝 놀랐다. 급히 집으로 뛰어가 어머니에게 이불과 먹을 것을 내달라고 하여 각시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각시와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산후 조리를 해주었다.
며칠 후 노총각이 들어와 각시를 범하려 하였다. 각시가 기가 막혀 범접을 못하게 하자 노총각은 상사병이 걸려 죽게 되었다. 노총각의 어머니는, “네년 때문에 내 자식이 죽었다.”며 각시를 내쫓았다.
각시는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살게 되었다. 하루는 길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데 어떤 여자가 오더니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정처없이 떠다니는 사람이라 하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래서 각시가 아들과 함께 따라가니 커다란 기와집으로 들어가서는 방을 하나 내어주면서 여기서 살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 서방에게 작은마누라를 하나 얻어다 놓았다고 하였다. 서방이 거짓말인가 여겨 가서 보려고 각시가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으나 살〔氣〕이 받쳐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마누라에게 온 서방은, “그 여자를 작은마누라로 삼지 않을 것이니 그냥 그애를 먹여살리라.”고 하였다.
각시와 아들은 그 집에서 먹고살게 되었다. 아들이 공부할 나이가 되자 그 집의 아들과 함께 유식한 스님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타관의 절에 공부하러 보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네의 총각대반과 머슴들이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소를 타고 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아들이, “이런 후레아들놈들, 여기가 마초(馬超) 관운장을 모신 곳인데, 소를 타고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오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총각대반이 화가 나서 그 아들에게 대들려고 달려오다가 담뱃대가 목구멍으로 쑥 들어가는 바람에 죽게 되었다.
머슴들은 “그자식이 그런 소리 안 했으면 총각대반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면서 아들을 관에 고발하였다. 아들은 결국 옥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을 살려 보려고 그 주인이 집의 살림을 다 팔아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한편 서울에서 진사를 하던 해남 윤진사의 아들이 해남 집을 찾았다. 마누라가 집에 없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연유를 물으니 어머니는, “네가 버리라고 해서 버렸다.”고 했다.
이 말은 들은 윤진사의 아들은 서울에 올라가 진사 벼슬을 사직하였다. 사직을 반려하는 상관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사 벼슬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녀 보려고 한다고 하였다. 상관은 윤진사 아들에게 바로 어사 벼슬을 내어주었다.
어사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던 윤진사의 아들은 어느 마을에서 죄지은 사람이 하나 처형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죄인을 찾아가 어디 사람이냐고 물으니 해남 사람이라고 말했다.
왜 사람이 죽었느냐고 했더니, “운장 마초 관운장 앞에서 담뱃대 빼라고 했다가 이렇게 됐다.”고 했다. 어찌해서 여기까지 왔느냐고 했더니 그건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자 어사는 네 어머니에게 물어 보고 오라고 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달려가 어찌 내가 이 외지에 있느냐고 물으니, “나는 해남 윤진사의 며느리가 되었다가 너를 산골짝 숯막에서 낳았다.”고 하였다. 다시 달려와 어사에게 그 말을 전하니, 어사는 바로 자기가 찾던 아들임을 확인하고는 어머니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다. 드디어 부부가 서로 마주 대하게 된 것이다.
마누라는, “자식 죽는 거 보려고 이제야 나타났느냐.”며 울었다. 윤진사의 아들은 자식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주인집에 같이 들어갔다. 그러자 주인이,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 자식을 살리느냐. 나는 그 자식을 살리려고 내 살림을 다 팔아도 못 살렸다.”고 말했다.
어사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팔았던 논밭을 다시 거두어 줄 요량으로 논밭을 샀던 사람을 모두 불러 돈을 돌려주고는 논밭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 그러고는 그 주인과 아래윗집에다 집을 짓고 잘 살았다.
[모티브 분석]
‘정혼’ 모티브는 설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부모끼리의 정혼이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고, 자식은 부모의 정혼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는 부모의 명에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유교적 덕목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찾기’도 설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진사 딸과 윤진사 아들 이야기」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형태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찾는 형태로 나타나지만, 부자간의 조우는 해체된 가정의 회복과 행복한 결말을 가져오는 기본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