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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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和英 |
영어공식명칭 | Lee Hway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정연주 |
활동 시기/일시 | 1392년 - 이화영 개국원종공신에 책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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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392년 - 이화영 상장군으로 승진 |
활동 시기/일시 | 1401년 - 이화영 예조전서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09년 - 이화영 지의정부사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15년 - 이화영 의정부참찬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424년 10월 27일 - 이화영 사망 |
묘소|단소 | 이화영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성 |
본관 | 청해 |
대표 관직 | 의정부참찬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무신.
[가계]
이화영(李和英)[?~1424]의 본관은 청해(靑海)이다. 할아버지는 여진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불화(阿羅不花)이며, 아버지는 조선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이다. 어머니는 예의판서(禮儀判書) 강보대(康普戴)의 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 강씨(谷山 康氏)이다. 부인은 판사 동안로(童安老)의 딸 동성 동씨이다. 아들은 이효량(李孝良)·이효정(李孝貞)·이효온(李孝溫)·이효검(李孝儉)·이효양(李孝讓)·이효강(李孝綱)이다. 아들 이효온이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로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청해 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후손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활동 사항]
이화영은 18세의 나이에 낭장(郞將)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이 있자 우왕을 시종하다가 이성계의 아들들 및 자신의 형 이화상(李和尙)과 함께 탈출하여 회군 세력에 합류하였다. 이후 사복정(司僕正)에 이르고 보공대장군(保功大將軍)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태조가 즉위하자 개국원종공신으로 책봉되었고 1398년 상장군(上將軍)으로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태종을 시위한 공으로 전토와 노비를 받았으며, 1401년 예조전서에 임명되었다. 1402년 아버지 이지란이 죽자 시묘(侍墓)를 하기 위하여 북청(北靑)에 있던 중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도망쳐 태종을 도와 난을 진압하였고 그 공으로 사전(賜田) 40결을 하사받았다.
이후 이화영은 승추부동지총제(承樞府同知摠制), 도총제(都摠制) 등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409년(태종 9)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1415년(태종 15)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419년(세종 1) 상왕인 태종과 세종이 함께 강무하던 중 평구역(平丘驛)[현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근처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양주(楊州) 조시배령(曺時背嶺) 남쪽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때 이화영은 3군 장수로서 어가(御駕)를 따랐다.
이화영은 1424년 10월 27일 사망하였다.
[묘소]
이화영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에 있으며, 정숙부인(貞淑夫人) 동성 동씨와 합장묘이다. 이지란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인 청해사[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독정로솔숲길 23-10] 바로 뒤에 있는 언덕에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