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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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産業-發祥地,三陟重工業地帶 |
이칭/별칭 | 북삼중화학공업단지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 |
집필자 | 배재홍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2년 준공 - 삼척시멘트제조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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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시멘트제조공사 - 강원도 삼척시 사직동 |
[정의]
강원도 삼척중공업지대는 풍부한 자원과 교통을 바탕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근대 산업의 발상지임.
[개설]
강원도 삼척 지역은 우리나라 근대 산업의 중심지였다. 삼척 지역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산자원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근대 공업이 발달하였다. 일제가 조선의 공업화를 정책적으로 확립한 것은 일본이 1931년에 만주 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방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조선의 산업정책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종래의 고전적인 식민지정책으로 조선을 지배하고 원료의 공급과 공업상품의 판매시장으로만 생각했던 일제는 중국대륙 전진기지로서의 조선 개발이 새로운 전략적 시각에서 재검토된 것을 계기로 조선의 공업화를 급진전시켰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일본의 입장에서 당장 급한 것은 전쟁물자의 생산이었다. 그 일환으로 일본은 종전의 식민지 정책을 전환하여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재편하였다.
[공업단지 입지환경]
일제강점기 조선은 공업 입지조건에서 상당히 유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업 자본이 풍부하였고, 노동 임금은 저렴하였으며, 일제 자본가 입장에서 노동 조건 등 노동 법령도 비교적 까다롭지 않았다. 또한 중국 대륙과 인접하고 있어 제품판매의 수송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26년부터 착수한 전원 개발(電源開發)은 조선의 공업화를 가능하게 한 큰 조건 중 하나였다.
삼척 지역의 산업화 역시 일본의 식민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지하자원 및 수산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공장을 건립하여 생산품을 삼척항과 묵호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해가고자 하였다. 그들의 북삼중화학공업단지 조성 계획은 삼척탄광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연료로 하여 삼척화력발전소를 세우고, 전기를 이용한 석회질소 비료공장인 북삼화학과 양양철광에서 생산된 철광석으로 철을 생산하는 제철공장, 그리고 삼척 지역에 풍부한 석회석을 바탕으로 하는 시멘트공장을 가동하고자 하였다.
[삼화제철공사]
삼척 지역에서 발달한 중화학 공업은 삼척에서 생산되는 지하자원과 관련이 있었다. 삼척에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제철하기 위한 삼화제철공사(三和製鐵公社)가 있었다. 삼화제철공장은 무릉계곡 부근인 삼화와 양양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제철하기 위한 공장으로, 현재의 동해시 북삼동에 1943년 4월 25일에 건립되었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군비확장에 따른 막대한 철강재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제철소를 건설하였다. 1940년에 미국이 고철(古鐵)에 대한 금수조치를 취하자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철강 소재의 공급원을 확충하는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 고레가와 제철의 삼척공장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삼화제철이 삼척공장을 운영하게 되지만, 1948년까지는 제대로 가동되지 못했다. 전력과 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기술자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1949년에 삼화제철은 1만t 규모의 선철 생산을 목표로 보수공사를 시작했으나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삼화제철은 1952년과 1953년에 부흥 사업비 3억 4357만 환을 투입하여 8기의 고로 중에서 3기를 보수하고, 1954년부터 가동하였지만 석 달도 되지 않아 연료난과 자금난으로 1957년까지 휴업하게 된다. 이에 정부는 2억 4800만 환을 들여 고로 1기를 국산 무연탄으로 선철 생산이 가능하도록 전환하였고, 다른 1기는 유연탄과 무연탄을 혼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한편 삼화제철도 1959년과 1961년에 고로 1기를 추가로 보수하여 1961년 이후에는 4만 8000톤의 선철 생산능력을 갖추고 1971년까지 고로를 가동하였다.
1960년대에는 삼화제철소 외에도 10여 개의 소규모 공장이 선철을 생산하였지만, 고철을 이용하여 재생 선철을 생산하는 것에 불과하여 진정한 의미의 제선공장은 삼화제철소뿐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삼화제철소 고로 운영 경험으로 향후 우리나라 철강산업에서 제선 부문을 담당할 수 있는 우수한 기술 인력이 배출될 수 있었다. 삼화제철소 고로는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명맥을 이어온 가교 구실을 하였다. 1~7호기는 1973년에 동국제강이 삼화제철을 인수하면서 생석회 소성용으로 전환되었다.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8호기는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991년에 대동건설이 삼화제철 부지에 아파트 건립을 추진하면서 고로가 철거될 상황이 되어 포스코가 고로를 인수한 후 이전하였다. 삼화제철소 고로는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매우 중요한 상징물로서 2005년 11월 11일 등록문화재 제217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시멘트공장과 화학공장]
삼척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회석을 원료로 하는 시멘트공장과 화학공장이 건립되었다. 시멘트공장인 삼척시멘트제조공사(三陟-製造公社)는 삼척시 사직동에 1937년에 기공되어 1942년에 준공되었다. 삼척시멘트제조공사는 일제강점기 오노다시멘트제조주식회사 삼척공장으로, 본사는 평안남도 승호리에 있었다. 연간 5만t의 시멘트를 건설현장에 제공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정부에서 관리하여 오던 중 1955년 3월 개헌경제조항에 의해 개인기업으로 전환되어 강직순 사장이 운영하였다. 그 후 1957년 6월 15일 이양구 사장이 인수하여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라 개칭하고 8차례를 증설하여 연간 1000만t이 넘는 규모로 시멘트를 생산하고 있다. 또한 삼표그룹 계열사에 편입되면서 2017년 3월 상호를 삼표시멘트로 변경하였다.
화학공장으로는 북삼화학공사와 백연화학공업주식회사가 있었다. 북삼화학공사(北三化學公社)는 당시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현 동해시 송정동]에 있었으며 석회질소 비료공장으로 1937년 4월 1일에 기공하고 1939년 3월 31일에 준공되어 삼척개발주식회사 북삼화학공업소로 조업을 개시하였다. 1945년 12월 20일에 카바이트 전로 1기를 운전하였으며, 1946년 10월 5일에 석회질소비료 생산 질화로 14기 중 4기를 운전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의 1, 2차 피난에 의해 조업을 중단하였다. 1961년 9월에 삼척 산업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국내 최초로 합금철을 생산하였고, 오늘날에는 선재공장 아연흑도금 설비로 운영하고 있다.
백연화학공업주식회사는 탄산칼슘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다. 백연화학공업주식회사 삼척공장은 당시 삼척군 북평읍 쇄운리[현 동해시 북삼동]에 있었으며, 본사는 서울 남대문로 3가에 있었다. 1953년 3월 13일에 설립되어 동년 8월 15일에 기공하였다. 주요 생산품은 침강성(沈降性) 탄산 칼슘(炭酸)[칼슘]이었으며, 용도는 고무공업 도료공업 치마분원료 등이었으나 현재는 휴업 상태이다.
협동유지회사(協同油脂會社)는 동해 바다에서 생산되는 수산자원을 바탕으로 설립된 유지공장이다. 1930년대에 동해 바다에서 정어리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1931년에 협동유지회사가 현재의 삼척항이 있는 정라진 7만평의 대지에 건립되었다. 삼척항은 공업지대뿐만 아니라 동해안 어업기지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1939년에 동양화학공사를 확대하여 소다를 생산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항공기 제조용 마그네슘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의 역할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동양 시멘트 회사에 인수되어 슬레이트 생산과 시멘트 포장지를 생산하였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교통]
삼척 지역이 일제강점기부터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자원과 편리한 해상 교통 때문이었다. 동해안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수심이 깊어서 좋은 항구를 만드는 데 유리했다. 일제는 이와 같은 조건을 갖고 있는 삼척항과 묵호항을 통해 한반도의 자원을 수탈하였고 삼척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수송하기 위해 일찍부터 철도를 개설하였다.
1937년에 일제가 조선무연탄주식회사로부터 광업권을 인수하여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삼척탄광, 북삼화학과 함께 삼척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에 도계에서 묵호항까지 철도가 개통되었고, 철도는 도계에서 현재의 태백시 철암까지 연장되었으며, 1944년에는 북평역에서 삼척역까지 철도가 완공되었다. 이 철도는 일제강점기에 삼척에서 생산된 무연탄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수탈용이었다. 한편 일본은 삼척에서 생산된 무연탄과 시멘트를 비롯한 공산물을 일본으로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삼척에서 포항까지 동해안을 따라가는 동해선 철도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중지되었다. 현재 삼척에서 궁촌까지 그 당시 철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삼척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최대의 군(郡)이었다. 당시 제주도 도지사보다 삼척군수가 더 힘이 있다고 할 정도로 군의 면적이나 경제 규모면에서 삼척군은 우리나라 최고의 군이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삼척 지역은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남한 유일의 중화학공업단지였으나 삼척 지역의 근대 공업이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경제가 위축되었다. 철광석을 비롯한 지하자원과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우리나라 타 지역과의 교통망도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삼척 지역의 중화학 공업은 쇠퇴하게 된다.
일제는 삼척에서 생산된 상품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교통망의 확충에만 노력을 기울였을 뿐, 한반도에 공급하기 위한 교통에는 소홀하였다. 지하자원을 비롯한 자원을 수탈해가는 데만 급급하여 자원이 고갈된 후의 대체산업에도 소홀하였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삼척 지역의 중화학공업은 삼척 지역에 대량으로 매장된 석회석을 바탕으로 하는 시멘트공장을 제외하고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