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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298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The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6.25 동란,6.25 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삼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흥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새벽에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은 삼척 임원진 강릉 등지의 동해안에 상륙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월 1일~9월 30일연표보기 - 북한 인민군에 의한 삼척 점령 시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월 1일~9월 30일연표보기 - 북한 인민군에 의한 삼척 점령 시기 종료
전개 시기/일시 1951년 - 6월 23일 소련의 제의로 7월부터 정전 협상
전개 시기/일시 1953년 - 7월 27일 정전 협정 조인
발생|시작 장소 6·25 전쟁 - 한반도 38도선 전역
발생|시작 장소 6·25 전쟁 동해안 북한군 상륙 - 강릉 옥계·망상|삼척 임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7일연표보기 - 삼척에 들어온 북한군 선발대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후발대는 남아서 자치위원회 등을 조직
발단 시기/일시 1950년 10월 15일연표보기 - 북한군은 후퇴하면서 군청 경찰서 등을 불태움
성격 사건|정전협정
관련 인물/단체 이승만|김일성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강원도 삼척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1953년 7월 휴전 성립 때까지 지속된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개설]

6·25 전쟁은 당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은 북한에 의해 1950년 6월 25일 38도선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삼척 지역은 7월 1일 북한군에 점령되었다가 9월 30일 수복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을 봉쇄하기 위하여 미국 주도의 유엔군을 조직하였고,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출하자 중국군이 개입하였다. 전선은 1년 만에 최초의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어느 한쪽의 승리, 무력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시켰다. 드디어 휴전회담으로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중지되었다.

[역사적 배경]

38도선 이남과 이북의 분단 정부가 서로의 체제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각각 북진 통일과 국토 완정[남진 통일]을 주장하면서 군사 충돌이 빈번하였다. 1949년 한 해 동안 미군이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데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였고, 소련이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일이 잇달았다. 김일성과 박헌영(朴憲永)[1900~1950]은 1950년 4월과 5월 소련과 중국을 차례로 방문하여 자신감을 내비치며 전쟁 의사를 밝히고, 두 나라로부터 지원 약속을 끌어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일제 침략의 퇴행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좌익과 우익의 세력 대결로 사회 전반이 불안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도선을 넘어 일제히 남침을 감행하였다. 당일 북한군은 삼척군 원덕면 임원리와 강릉 옥계면 금진리에 상륙하여 동해안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전쟁 시 삼척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8사단 21연대는 남북 도로가 차단됨에 따라 백봉령을 넘어 제천 방향으로 이동하였고, 주민들도 오십천을 따라 남쪽으로 피란하였다. 삼척은 7월 1일 북한군에 점령된 이후 9월 30일 국군에 의해 수북될 때까지 인민군 점령기였다. 전쟁 초기에 삼척 지역에는 북한군이 상륙하였지만 큰 전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1951년 유엔군이 삼척-평택 방어선 구축 이후 전쟁 일지에서도 특별한 전황은 보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부는 함께 서울을 사수하자는 거짓 방송을 한 뒤 몰래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라며 6월 28일 새벽에 한강 철교를 폭파하였다.

국제연합[유엔]군은 미국 중심의 16개국으로 결성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은 1950년 8월 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이남으로 밀어붙여 이남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세는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급격히 변화하였다.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킨 다음 인민군을 전면 공격하였다.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10월 15일 삼척을 습격하여 군청과 경찰서를 방화하였다. 10월 16일에는 강릉, 19일에는 주문진을 습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0월 13일 중국 공산당이 한국전쟁 참여를 공식 결정,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에 밀려 큰 피해를 본 채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서울 거리에는 다시 인공기가 휘날렸다. 그러다가 1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다시 개시되면서 전쟁은 38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 양상을 보였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이 유엔 대표를 통해 휴전을 제의하자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7월에는 정전 협상이 본격 시작되었다. 전쟁은 1951년에 마무리될 수도 있었지만 정전 협상은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오래 끌었고, 그 사이에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953년 7월 27일 미국과 북한-중국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한국전쟁은 휴전을 맞게 되었다.

[결과]

전쟁이 길어지면서 수많은 젊은이가 군대에 동원되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이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일생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부상자도 속출하였다. 수많은 어린이가 전쟁 고아로 남게 되었으며, 가족과 흩어진 이산가족은 무려 1000만 명이 넘었다. 경제 피해 규모도 천문학적 규모였다. 국토는 황폐화되었으며, 산업 시설 대부분은 회복 불능으로 파괴되었다.

남과 북의 인구를 합하면 약 3000만 명이었지만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숨지거나 다친 사람이 전체 인구의 1/7 안팎이나 되었다. 전쟁으로 남북 모두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하고 강제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으며[제1차 헌법 개정, 1952. 7], 북한에서도 김일성 독재 권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6·25 전쟁은 국제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강대국들의 국내외 정책과 한민족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소련, 중국은 국제 지위가 강화되었다. 한국은 반공 국가 질서를 강화하였고, 미국과 유엔을 나라를 구해 준 은인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그동안 소련의 위성국가로 출발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중국과 가까워졌으며, 김일성 유일 체제 및 반미주의를 강화하였고, 경제 체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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